성취와 존재 사이에서

존재 그 자체로 충분한 당신에게

by 바라움

"올해는 뭘 이뤘어?"

연말이 되면 우리는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집니다. SNS에는 한 해를 정리하는 게시물들이 넘쳐나고, 누군가는 승진을, 누군가는 자격증을, 누군가는 다이어트 성공을 자랑합니다. 그 화려한 피드를 보며 우리는 묻습니다. "나는 올해 뭘 했지?" 그리고 곧 답합니다. "별로 한 게 없네."


진료실에서 만나는 많은 분들이 12월이 되면 유독 우울해하십니다. 한 해를 돌아보는 시간이 자책의 시간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계획했던 목표의 절반도 이루지 못했고, 작심삼일로 끝난 결심들을 세어 보면 열손가락이 부족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게으르고, 의지가 약하고, 쓸모없는 사람 같다고 느낍니다.


요즘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어야 하고, 생산성을 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살아갑니다. 하루를 보내며 '얼마나 유의미한 결과를 냈는지', '시간을 얼마나 잘 썼는지'가 스스로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곤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떤 일이든 의미를 찾기보다는 성과가 있느냐, 생산적인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자신을 '점수표'처럼 대합니다. 오늘 운동했는가? 책을 읽었는가? 계획한 일을 완수했는가? 하루의 끝에서 자신에게 매기는 점수가 낮으면, 그날의 자신은 쓸모없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생산하는 존재'로만 자신을 정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삶이란 반드시 무언가를 성취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존재이고, 결국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짧은 시간을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는 데 쓰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요? 저는 삶이라는 것이, 성과를 증명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살아가는 시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취의 욕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취는 인간의 자아실현 본능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동기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무언가를 이루고 싶고, 계획을 세워 실행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모든 행동의 출발점입니다. "내가 잘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 어느 순간 "내가 이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려는 수단"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자신에게 가혹해지기 시작합니다.


영어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어떤 날은 피곤하거나 여건이 되지 않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쉽게 자신을 탓합니다. "나는 왜 이것도 못하지?", "역시 난 안 되는 사람이야." 목표를 이루지 못한 날이면, 내 존재 자체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마음이 찾아옵니다.

진료실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저는 환자분께 조용히 되묻곤 합니다. "처음에 영어 공부를 시작하려던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그러면 대부분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제 삶이 더 나아질 것 같아서요. 더 많은 기회가 생길 것 같아서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원래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못한 나를 자책하고 후회하는 일에 에너지를 써버리는 바람에, 도리어 무기력해지며 '잘 사는 것'에서 멀어집니다. 못한 날엔 "오늘은 좀 어려웠구나. 내일 다시 해보자." 하고 자신을 다독이고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그리고 해낸 날에는 "내가 원하는 걸 해냈네. 참 잘했어." 하고 기뻐하는 것이지요.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 연민(self-compassion)'이라고 부릅니다. 자기 연민은 나약함이나 자기합리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실패와 좌절 앞에서도 자신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성숙한 태도입니다. 많은 연구에 따르면, 자기 연민이 높은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더 높은 성취를 이루고, 심리적으로도 더 건강합니다. 자신을 혹독하게 다그치는 것보다, 따뜻하게 격려하는 것이 더 멀리 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이제 곧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이 시기에는 많은 분들이 '올해 내가 해낸 일'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하지 못한 일들'에만 집중합니다. 계획했던 일 중 못 지킨 것, 포기한 것, 중간에 멈춰버린 것들 말입니다. 그리고 그 목록을 보며 자신이 실패한 사람 같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올해 당신은 분명히 많은 것을 해내기도 했습니다. 크고 작든, 누군가가 알아주든 말든 간에, 버텨냈고, 일어났고, 다시 해보려 했고, 그렇게 살아냈습니다. 때로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 자체가 용기였던 날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닦아내고 다시 웃어 보였던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당신의 성취입니다.


이번 연말에는 못한 것만 보지 말고, 잘해낸 것도 반드시 함께 바라보며 한 해를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그 모든 시간 속에서 가장 수고한 사람은 바로, 당신 자신이었습니다.

당신은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만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살아있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소중한 사람입니다.

내년에도, 그 다음 해에도, 이 사실만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