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만은 글로발(?)한 첫 이직(1)

느거 서장 남포동 살제?? 내가 ima 유럽, 인도, 북미, 남미 다 해

by 김바코드

첫 직장은 용인시의 창고에서 시작했습니다. 창고보단 상당히 큰, 수 천평의 창고였기에 요즘은 센터(Center) 라는말을 물류 회사에선 더 선호하니 센터근무라 하겠습니다.


저의 첫 이직은 국제물류주선업을 하는 회사로 이직을 했습니다. 이제 센터의 화물(물건)들이 아니라 사람 얼굴을 보며 일할 수 있겠다는 반가운 마음이 컸습니다. 그리고 팀 이름은 ‘해외파트너팀‘으로 이름만 들어도 글로벌한 팀같아 부푼 꿈을 안고 첫 이직을 했습니다.


국제물류주선업이라 하면 흔히 ‘포워딩(Forwarding)‘회사라 합니다. 화물을 수출, 수입할 때 물류주선업자를 통해야 하고 각 화주사들의 포워더 파트너끼리 국제적으로 협약된 인코텀즈(INCOTERMS)라는 국제협약에 따라 화물,보험, 비용에 대한 지불 및 책임을 약속해 화물을 운송 거래 합니다.


물류정책기본법에서는 "타인의 수요에 따라 자기의 명의와 계산으로 타인이 물류시설, 장비 등을 이용하여 수출입 물류화물을 주선하는 산업" 이라고 합니다. 즉, 자본이나 기반시설이 없어도 아주 지극히 물류에 대한 지식과 화물의 주인들의 요청만 있다면 할 수 있는 물류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창고에 있던 시골놈이 갑자기 미국, 영국, 터키 각 국의 해외 파트너들과 소통을 해야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토익점수는 간신히 800을 넘었고 외국인과 얘기해 본적은 없었지만, 영작은 나름 했습니다. 해외 파트너들 요청에 따라 항공(carrier)스케줄을 조정하고 가격을 협의하는 일들이었습니다.


창고에서 일을해 물류의 흐름은 알았지만, 실무를 몰라 모두 배운다는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월급도 정말 작았습니다. 안그래도 작은 월급을 '청년내일채움공제'라는 중소기업 신규진입 청년에게 2년 간 월급의 일부를 내면, 2-3천만원+복리에 해당하는 지원금을 준다는 제도로 일부 제외했습니다.


취지는 좋은데, 저는 청년내일채움공제를 내고 나면, 통장에 150만원이 찍혔습니다. 2017년도인걸 생각해도 작은 월급이고 당시에 저는 막 결혼한 신혼부부였고 아이는 없었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한지 3년 정도 되었는데 이 월급으로 약 1년간 회사를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매일 야근, 주말 원격근무, 낮은 월급에 건강, 자존감 모두 잃고 우울증이 살짝 왔던 것 같아요.


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의 시장가치는 연봉이 지표라 생각했습니다. 할 줄 아는게 없으니까라고 저를 계속 채찍질 하면서 밤, 주말 내내 일했습니다. 나중에 팀장이 말하길 제가 있던 자리는 앞서 한 달간 3명이 퇴사한 자리였었네요. 모두가 힘들어하는 자리였고 제가 퇴사한 뒤로도 제 자리를 못버텨서 나중에는 2명이서 일하는 얘기를 들으니 뿌듯(?)하면서도 참으로 씁쓸하고 그 자리를 1년 했으니 충분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때는 근데 회사생활은 참으면서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직을 해서 온 자리지만, 사회 분위기도 그랬었구요. 근데 제가 이직을 남들보다 쉽게 생각하게 된 하나의 시선이 있었는데 층별 안내도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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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태정 : 네이버 블로그)


강서구에 위치한 회사를 다녔고, 이 지역에 많이 있는 흔히 공장형 오피스, 지식산업센터라고 하는 큰 건물에 수없이 많은 회사들이 빼곡히 들어있습니다. 사진은 식당들이지만, 1층 부터 20층까지 1층에 몇개의 회사인지 이 건물에 이렇게 많은 회사가 있구나라는걸 1층에 회사 안내도를 가만히 보면서 내가 일이 안맞다면, 적어도 이렇게 많은 회사 중에 하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회사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서서 회사 이름을 읽어보면서 아 내가 이렇게 죽을듯이 힘들면 이직을 하는게 맞겠다. 이직이 잦으면 리스크일텐데? 여기서 버티면 내 월급은 150에서 내년엔 얼마가 될까? 혼란스러우면서도 결심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때의 나는, 버티는 게 성장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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