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_열역학 법칙
A.
퇴근길. 약속된 장소에 서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자. 신호가 통했는지 방울 소리가 두 번 울린다. 그리고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A의 양팔을 잡고 도착한 차에 태운다.
삶의 끝이 어딘지 묻는다면 A는 늘 자신이 있는 모든 곳이라 대답하고 싶다. 오천 원, 만원. 남들에게는 가볍게 받는 용돈이고. 월급의 1%도 채 안 된다. 그런 A에게 300만 원을 잃는 것은 세상을 잃은 것이다.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아득바득 모은 돈. 맘 편히 팔다리를 쭉 피고 잘 수 있는 원룸의 보증금. 그 돈을 전화 한 통에 날렸다. 돈을 가져간 수신자는 다시 연락할 수 없다. 경찰은 고개를 저을 뿐 워낙 빈번한 사건이라 돌려받는 것은 포기하고 없는 셈 치라 한다. 응, 그래. 없는 셈 치자. 나라는 사람은 없는 셈 치자. 등신. 머저리. 하지만 A에게는 죽을 곳도 없고, 마땅한 용기도 없다. 여과 없이 몸을 부르르 떨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 창고에서 몰래 담요를 꺼내 잠이 든다. 머릿속에는 어떻게 해야 아프지 않고 죽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뿐이다.
쿵.
가게 전체가 울릴 듯 커다란 소리에 잠에서 깬 A는 설마 사장이 온 건 아닐까 숨을 죽이며 담요를 정리한다. 다시 쿵. 숨을 참는다. 또다시 쿵. 문이 열린 것 같다. 사장이 아니다. 사장이었으면 이렇게 요란하진 않았을 거니까. 탁 탁 탁. 두터운 신발 소리가 다가온다. A는 버티기 힘들어 조금씩 코로 공기를 마신다. 이젠 들켜도 어쩔 수 없다. 어쩌면 다행일 수도. 죽는 걸 원했잖아. 타살이면 더 나을 수도 있어. 스스스. 옷감 스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창고 문 앞까지 왔다. 그리고 말한다. A씨, 살게 해드릴게요.
B.
B는 귓말을 켠다. 식은 라면을 한 입 넣고 눈은 모니터에 고정한다. ‘방울님. 오늘 ㄱㄴ?’ 상대 유저도 B에게 귓말을 보낸다. ‘ㄱㄴ'. B는 방울과의 게임을 위해 왼 다리를 접고 오른 다리를 세우며 편한 자세를 잡고 헤드셋을 낀다. B의 방 안에는 키보드 타자 소리와 마우스 클릭음, 록밴드의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가득 메우고 있다.
'히키코모리' 은둔형 외톨이 또는 사회적 위축자라고도 하지만, 사회에서는 찐따. 루저. 실패자 등으로 불린다. 제 몫을 못 하고 부모의 돈으로만 생활하며 방 안에서 나오지 않고 사회와 단절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게 B다. 어디서부터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부모님이 문을 두드리던 소리를 마지막으로 언제 들었더라? 어느샌가 날짜를 세는 것도 잊고, 왜 이렇게 됐는지도 잊었다. 그저 낮인지 밤인지도 구분 못 하고 게임 속에서만 살고 있다. 방울과 게임을 하면서도 귓말은 끊이질 않는다. 주로 이기기 위한 전략이나 새로 산 게임 아이템 스킬이 어떤지만 이야기하지 사적인 내용은 일절 없다. 그렇게 두 유저는 팀에서 승리를 이끌었고 B는 모니터 화면에 크게 뜬 'WIN’을 보며 만족한다. 한 판 더 하려 방울에게 제안하려는데, 방울 쪽에서 먼저 귓말이 온다. ‘B님, 방에서 나오게 해드릴까요?'
C.
안녕히 계세요. 라고 짧게 목례 후 문을 열고 나온다. 잠시 후 이름이 불리자 일어나 처방된 약을 받고 다음 예약 날짜를 잡는다. 일주일 뒤에 뵐게요. 라는 간호사의 말에 C는 역시 애써 웃음을 건네며 문을 열고 나간다. 딸랑. 문에 달린 하얀 방울이 소리를 낸다. 벌써 계절이 10번도 더 바뀌었다. 그 10번의 계절 동안 C는 꾸준히 정신의학과에 방문해 약물치료를 하고 있다. 엘리베이터 1층 버튼을 누르며 C는 문득 생각한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난 거지. 그리고 나는 왜 여전히 여기 그대로 있지.
밤마다 C를 괴롭히는 꿈. 이 꿈을 꾸면 항상 잠에서 깬다. 발작과 함께 일어난 C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있다. 인상을 찌푸리며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오늘 낮에 받아온 약을 먹고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그러는 동안 땀은 식었고, C는 으슬으슬 떨리는 몸에 옷을 갈아입는다. 생각하지 않으려 하지만 꿈속 내용이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된다. 서류 뭉치는 C의 이마를 툭툭 밀친다. 사람들은 밥을 먹고 들어와 한 손에 커피를 쥔 채 C를 바라보며 비웃음을 날린다. 듣겠다. 어서 가자. 말소리가 들린다. 떨어진 물건을 주우려 몸을 숙인 C의 머리에 물이 왈칵 쏟아진다. 흐르는 물에 눈을 뜨지 못하는 C에게. 아이고 몰랐네! 미안. 하고 킥킥댄다. C는 눈앞이 하얘지고 정신이 몽롱해진다. 약효가 올라오나 보다. 몽롱해진 정신을 부여잡으려 식탁을 잡는데 손에 처방전이 잡힌다. 평소였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테지만, 이날 따라 유독 처방전을 펼쳐보고 싶었다. 직사각형으로 접힌 처방전을 촥 펼치자 메모지 한 장이 툭 떨어진다. C는 메모지를 손으로 집으며 적혀진 글씨를 읽으려 안경을 쓴다. 메모지 위에는 정갈한 글씨로 C에게 전하는 말이 적혀있었다. C님,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LOV.
릴리는 아픈 목을 두드리며 눈앞에 있는 줄기를 들여다본다. 이 상태만 벌써 10년째. 차도가 보이지 않아 지칠 만도 한데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왜 그렇게까지 몸을 혹사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씨앗을 발견하여 발아할 때까지가 5년이 걸렸고 개시된 싹이 1cm 자라기까지 3년이 걸렸다. 그리고 지금. 싹이 줄기가 될 때까지 10년이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자라나기 때문에 릴리는 결코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중간에 획득한 씨앗을 썩혀 잃기도 했고, 얼마 남지 않은 씨앗을 복제하는 기간까지도 포함하면 30년은 훌쩍 넘었을 것이다. 커스는 그런 릴리를 지켜보며 지독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그래도 오랜 기간 고생한 그의 결실을 함께 지켜보고 이뤄내고 싶었다. 커스는 벽에 있는 에너지 수치를 기록하며 릴리에게 그래도 수치가 올랐으니 차도가 생길 것이라 말한다. 릴리는 손짓으로 알겠다는 의미를 건네고 다시 식물을 들여다본다. 아무래도 흙에 수분을 더 공급해 과습 상태를 더 길게 유지하고 빛을 감소시켜야겠다.
커스는 실험실 문을 열고 들어가 실험체들의 상태를 체크한다.
A. 1년 전과 비교하면 에너지양이 많이 줄었음. 방출 요망.
B. 에너지 배출량이 일정함. 자극 요소를 더 찾아 에너지 배출량을 늘리는 것을 목표.
C. 10년 동안 매일 조금씩 에너지를 배출하고 있지만, 다른 실험체보다 양이 훨씬 적음. 마찬가지로 자극 요소를 더 찾아 에너지양을 늘릴 것.
커스가 하는 일은 매일 실험체를 관찰하고 자극하며 에너지를 얻어내면 배출된 양을 수치화시켜 에너지 저장소에서 에너지를 응집해 릴리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릴리는 커스에게 전달받은 에너지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자연에 조금씩 나눠 공급한다. 둘은 자연에서 딱 한 가지. 오로지 딱 한 가지 식물의 꽃을 보기 위해 이렇게 노력 중인 것이다.
아주아주 먼 옛날 지구에는 꽃이 있었다. 꽃은 각양각색의 색과 향기로 사람들에게, 지구에 큰 기쁨을 안겨주었고, 꽃 속에 담긴 수많은 언어는 사람들 마음속에 그 꽃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이유도 돌연 이유도 모른 채 꽃은 이 지구상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왜지? 어디로 간 거지? 누가 궁금해했다면 꽃을 찾아 다시 행복을 찾아 헤매었을 테지만 사람들은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이 스트레스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꽃의 존재를 잊어갔다.
릴리는 아예 꽃의 존재를 몰랐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으며, 그저 나무와 같은 식물이라는 것만 떠도는 이야기로 알고 있었다. 나무에도 꽃은 피지 않았다. 그러니 릴리에게 이 실험은 성공 가능성이 0에 수렴했다. 꽃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꽃을 피울까.
릴리가 태어난 세상은 잿빛 세상이었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릴리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 옛날 사람들이 잊은 ’꽃’에서 따왔다며 향기롭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씨앗은 릴리가 연구원이 되기로 진로를 정했을 때 부모님께 받은 것이다. 부모님은 언젠가 이 씨앗이 꽃이 되면 세상의 색이 바뀔 것이라 말했다. 릴리는 점점 더 꽃을 피워내고 싶었다. 바뀐 세상의 색이 궁금했다. 잿빛이 걷히면 어떤 색이 나를 마주할지 기대됐다. 그렇게 기약 없는 실험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에너지가 필요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릴리는 세상에 가장 큰 에너지를 이용하기로 했다. 바로 ’스트레스 에너지‘ 잿빛 세상 속 사람들은 거의 스트레스를 가지고 살아갔다. 그리고 그중에서는 잿빛을 넘어 검은색으로 뒤덮인, 삶의 의지가 없는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자극해 에너지를 모은다면, 사람들은 스트레스 에너지가 소거되고 인공 자연을 만들어 꽃을 피울 수 있지 않을까? 릴리는 그렇게 오랜 기간 가설에 따라 실험을 반복했다.
과연 꽃은 피어날 것인가. 세상은 바뀔 것인가.
* 귓말=게임 속에서 특정 유저들끼리만 소통할 수 있는 ‘귓속말’의 준말
* 은방울꽃의 꽃말에서 착안했습니다.
* 은방울꽃의 꽃말은 ‘언젠가 돌아올 행복’입니다.
* 글 속에 인공 자연의 계절은 5월 중순경입니다.
* 릴리의 이름은 은방울 꽃에서, 커스의 이름은 떡갈 고무나무에서 따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