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통하지 않아도 마음은 통한다.
육로로 다른 나라를 이동한다는 건 대한민국에선
상상할 수 없는 현실이다.
북한만 아녔어도 유럽까지 기차로 횡단이 가능했을 텐데 어쩌겠는가? 섬이나 다름없는 우린 분단국가인 것을...
태국여행 후 심한 여행 앓이를 했다.
병에 걸린 건 아닌가 해서 보건소에 진료 보러 갔는데
의사 선생님 왈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네요. 다시 여행 가시면 나아요.”
참 황당한 말이었지만 사실이었다.
태국 여행을 다녀온 후 한 달 뒤 다시 난 동남아 3개국(태국, 캄보디아, 베트남)을 목표로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육로로만 이동 가능한 3개국에 너무 큰 감동을 했다.
비행기도 배도 아닌 버스로 이동 가능하다니
너무나 멋지지 않은가?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나에게 다양한 세상 이야기를 해주었고 평소 생각지 못했던 여행지에 꿈을 불어넣어줬다. 그중 워킹홀리데이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았고 한결같이 추천했다. 해외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나로서는
그들이 참 부러웠다. 한국으로 돌아와 만약 내가 해외에서 산다면 무얼 해서 돈을 벌며 살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 기술이 필요한데 재미없는 일은 죽어도 못하는 성격에 정말 많은 고민을 했었다. 어느 날 우연찮게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 추출하는 모습을 보고 “저거다. 나도 한번 배워볼까?” 하는 호기로운 마음으로 바리스타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커피를 평소 마시지도 않았었던 내가 바리스타가 되다니
인생 참 재미있네.
2년간 일하다 보니 또 장기여행의 갈망이 꿈틀꿈틀 기어 나왔다. 육로 여행에 첫맛을 보았으니 좀 더 다양하게 이동하고 싶어졌다. 배로 일본을 가본 경험이 있었으니 이번엔 중국으로 가보고 싶어 져 인천에서 칭다오로 가는 배를 예약했다. 인천항에 수많은 중국인들이 고국으로 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고 그 시간 동안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껍질 있는 해바라기씨를 발라먹느라 “톡톡” 소리가 대기실을 가득 메웠다.
중국을 가기 전 주변 사람들이 좋은 말보단 위험하다는 말을 너무나 많이 해서 긴장을 많이 했다. 중국어는 할 줄도 모르는데 육로 이동 여행을 위해선 가야 했다. 관광비자도 배안에서 받을 수 있다고 해서 따로 받지 않고 갔다. 기존엔 한 달 정도 받을 수 있는데 항저우 아시안게임으로 인해 14일만 주더라.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미리 예약해둔 호스텔을 찾아갔는데 생각보다 너무나 깨끗하고 좋아서 중국에 대한 편견이 하나 삭제되었다. 칭다오 구석구석 걸어 다니며 느끼는 중국을 보니 우리랑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지.
다음 행선지는 상하이로 결정하고 기차표를 숙소에 예약 요청했다. 처음 이동해보는 장시간 기차라 침대칸으로 이동하고 싶었는데 매진되어 앉아가는 자리밖에 없다고 했다. 20시간 이동하는 거리인데 인생에 이런 경험이 없었던 지라 덜컥 예약을 했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맞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참 무모한 결정이었지만 그 결정이 아니었다면 엠마를 만나지 못했겠지?!
그녀를 만난 건 나와 같은 상하이행 옆 자석이었다.
기차를 탄 순간 사람들은 자신의 짐을 쇠사슬로 묶고 있었다.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나라에선 짐을 두고 잠시 어디 다녀와도 훔쳐가는 일이 드문데 이 나라에선 통하지 않는가 보다. 나는 일행도 없고 혼자인데 나의 배낭을 어떻게 사수할 수 있을까? 무표정한 중국인들 사이에서 나는 상하이까지 안전하게 도착 가능할까?
움직이지 않는 일자로 연결된 의자로 3명씩 앉아야 해서 잠도 앉아서 자야 할 판이었다. 처음 경험치고 너무 가혹하다. 막막한 생각으로 가득한 순간 옆에 앉은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자신이 화장실 갔다 올 테니 짐을 봐달라는 것이다. 그것을 계기로 한마디 주고받다가 그녀가 한국 드라마 마니아인걸 알았다. 그때 한참 방영 중이던 <시크릿가든>도 알고 있어서 너무 놀랬다. 드라마, 슈퍼주니어, 한국 이야기 들을 이야기하며 그 긴 시간을 그녀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상하이에 도착하니 그녀의 어머니가 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예약한 숙소가 그녀의 집과 가까워서 같이 이동하였다. 초행길인데 이렇게 안내까지 받게 되다니 이런 행운이 어디에 있는가?
그녀의 삼촌은 국숫집을 운영하셨는데 중국 영화에서 보았던 건물 안에 빨래들이 널려있고 허름한 작은 식당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먹은 국수는 지금도 잊지 못할 만큼 너무 맛있었다.
여행길의 인연으로 그녀는 내가 상하이에 지내는 동안 가이드를 자처했다. 맛있는 딤섬 집도 데려가 주고 사진도 명소마다 찍어주었다.
하루는 자신의 집에 식사초대까지 해주었다.
빈손으로 가기 뭐해 과일주스 2병을 사서 갔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도로 가져가서 마시라며 한사코 거부하셨다.
문화의 차이인가? 우린 남의 집에 갈 때 빈손으로 가면 안 된다고 배웠는데...
만둣국에 중국 가정식을 차려주셨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 배가 터질 뻔했다. 중국은 손님 대접할 때 음식양을 많이 한다더니 그 말이 맞네.
정은 한국인의 특성이라고 알았지만
중국인도 정이 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선의를 베풀어준 엠마.
이때부터 여행의 의미가 달라진 것 같다.
관광지를 보는 여행이 아닌 사람을 만나는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