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나는 지갑을 잃어버렸다. 평소처럼 버스에서 하차할 때 교통카드를 찍으려 가방 속에 손을 넣어 휘휘 저으며 지갑을 찾았지만, 그 익숙한 가죽 지갑의 감촉이 도저히 손끝에 걸리지 않았다. 분명 버스에 승차할 땐 교통카드를 찍으면서 탔기 때문에 버스에서 지갑을 떨어뜨린 게 분명했다. 그러면 하차하지 않고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 바닥을 다시 한번 살폈어야 했는데, 너무 당황해서인지 난 그냥 그대로 하차해버리고 말았다. 정류장에서 멀어지는 버스를 돌아보며 버스 번호판을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차한 버스 정류장에 멍하니 서서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스스로 파악하는 데에 온 정신을 쏟고 있을 뿐이었다. 뒷목에서부터 열기가 오르는 게 느껴졌다. 버스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적은 처음이었기에 유독 당황스러웠다.
'지갑을 잃어버렸다. 망했다.'
한참이나 정류장에 멍하니 서서 이 간단한 팩트를 겨우 이해하고 나자 나는 무작정 다산 콜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보통이면 핸드폰으로 버스 회사 전화번호부터 찾아봤겠지만 지갑과 함께 뇌도 같이 버스에 흘리고 내렸는지 나는 핸드폰으로 다산 콜센터 전화번호부터 검색했다. 그냥 다산 콜센터라면 무엇이든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112로 전화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한껏 떨리는 목소리로 콜센터 안내원분께 사정을 설명하자 버스 회사 전화번호를 친절히 알려주셨다. 그제야 전화를 끊고 다시 버스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또 떨리는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하니 직원분께선 내게 몇 시쯤 정류장에 내렸는지를 물으시고는 버스가 종점을 지나 차고지로 돌아오면 찾아보고 연락을 주시겠다고 했다. 다산 콜센터 안내원 분도, 버스 회사 직원분도 가능한 도움을 전부 주셨다. 이젠 그냥 종점으로 돌아온 버스에서 지갑을 찾았다는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는 게 최선일뿐이었다. 하지만 잔뜩 당황한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손끝이 차가웠다. '대체 내가 왜 생각 없이 그냥 하차를 한 거지?'라는 자책을 반복하며 집에 돌아와서는 불도 키지 않은 채 어두운 침대에 앉아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외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의 이런 과민한 반응을 이성적으로 설명해보자면 다음과 같은 핑계를 들 수도 있었다.
1. 예상보다 길어진 공백기에 한껏 예민해져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
2. 안에 현금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있었다.
3. 신분증과 카드가 전부 들어있으니 지갑을 분실하는 게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지갑을 떨어뜨리고 그렇게나 당황해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홀로 침대에 앉아 눈물을 왈칵 쏟아내 버린 이유는 긴 공백기로 예민해진 탓도, 지갑 안에 들었던 현금 5만 원짜리 때문도, 신분증이랑 신용카드 때문도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석사 공부를 하던 때 학교 앞에 있던 작은 가죽공방에서 샀던 지갑, 지난날 열정만 가지고 타지에서 도전을 이어온 나의 손때가 묻어 나만의 색으로 변해버린 가죽 지갑, 그 지갑 때문이었다. 내 생에 가장 큰 용기를 내어 떠났던 타지에서의 내 땀과 눈물, 웃음과 꿈이 묻어, 지갑 본연의 베이지 색은 찾을 수 없게 된 그 지갑 때문이었다.
그 지갑에는 지난날의 내가 그대로 묻어있었다. 안 그래도 퇴사 후 공백기가 1년이 훌쩍 넘어 2년째를 향해 가며 나는 '왜 예전처럼 용기 있게 도전하지 못할까', '안주하려고 할까', '왜 하고 싶은 일을 모르겠는 걸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끝없이 스스로에게 퍼붓고 있던 나였다. 그런 내가 좋아했던 지난날의 내 모습, 내 용기, 도전, 꿈, 땀, 눈물이 모두 묻은 지갑을 잃어버림으로써 난 내가 좋아했던 과거의 '나'를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 더 이상 그 도전심 강하고 용기 있던 과거의 '나'는 이곳에, '지속가능한 공백기'라는 핑계를 대며 안정을 위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안주하기 위해 이사 온 이곳에선 존재할 수 없다는 현실이 눈앞에 들이밀어진 기분이었다. 내 지갑이 버스와 함께 떠나버린 것처럼 과거의 '나'는 이미 떠나버려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버스를 하차하는 순간 엄습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머리론, 내가 더 이상 과거의 '나'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 늘 회피했던 그 명제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번쩍번쩍 경고등을 튼 채 정면에서 나를 들이박았다. 도저히 피할 길이 없었다.
지갑을 잃어버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대학 입학 후 처음 샀던 외장하드가 고장 났다. 이력서를 쓰다가 외장하드에 저장해 두었던 예전 자료를 참고하려고 오랜만에 연결했더니 저장된 파일들이 읽히지 않았다. 연결 케이블을 바꾸기도 해 보고 컴퓨터를 껐다가 다시 켜보기도 했다. 그래도 읽히지 않았다. 사실 그 안의 자료 없이도 이력서는 충분히 쓸 수 있었지만 무슨 오기가 났는지, 나는 한참이나 외장하드를 연결해 보려 씨름했다. 인터넷에 '외장하드 인식 안됨'을 검색하면 나오는 온갖 방법을 다 써봤다. 컴퓨터와는 거리가 먼 내가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윈도우의 검은 창까지 열어 인터넷에서 알려준 대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명령어를 써보기도 하고, 한 번도 클릭해 본 적 없는 프로그램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새로운 프로그램도 깔아보고 온 난리를 쳤다. 그러다가 오히려 외장하드 상태가 더 악화된 것 같았다. 처음에는 외장하드 자체는 인식이 되었는데 그 안에 저장된 파일이 읽히지 않는 문제였다면, 내가 문제를 해결해 보려 여기저기 건들다 보니 이젠 외장하드가 컴퓨터에 연결됐다는 인식조차 되지 않았다. 땀에 흠뻑 젖은 양손을 바지에 닦으며 서둘러 외장하드 복구 업체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검색 페이지 위에서부터 뜨는 업체를 하나하나 보며 대충 평균 견적을 가늠해 보니 수십만 원 정도가 필요했다. 내가 괜히 이것저것 더 건드린 탓에 업체에 가서 외장하드의 상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컴퓨터는 잘 몰랐지만 내가 외장하드를 더 고장 내 복구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사실 그 보다 가장 큰 문제는 공백기 2년 차에 들어선 내게 생활필수품도 아닌, 당장 없으면 안 되는 것도 아닌 외장하드를 복구하기 위해 한 달 월세와 비슷한 돈을 선뜻 지불할 여유가 없다는 현실이었다.
사실 그 외장하드에는 이력서를 쓰는데 참고할만한, 과거에 작성했던 문서들 뿐만 아니라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샀던 DSLR로 찍은 모든 사진들이 다 저장되어 있었다. 20살 때 처음 샀던 외장하드였기 때문에 그때부터 몇 년간 찍은 사진들이 전부 그 안에 있었다. 언니가 고등학교 때 선물로 준 필름카메라를 계기로 사진을 취미로 시작했던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DSLR을 샀었다. 지금처럼 미러리스나 하이엔드 카메라가 나오던 시절도 아니었고, 핸드폰으로 달 사진을 찍고 뮤직비디오를 찍을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다. 항상 들고다니기엔 꽤 무겁고 큰 DSLR을 나는 거의 매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곤 했었다. 나의 첫 해외 경험이었던 일본에도 당연히 카메라를 가져갔었다. 일본에서도 늘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교환학생 때 만난 소중한 친구들과 도쿄의 풍경을 열심히 담았었다. 그렇게 수년에 걸쳐 쌓인 수천 장의 사진이 그 외장하드에 담겨있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 날아갔다. 20살 때 산 외장하드였으니 10년이 넘어 고장 날 때가 되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처음 연결이 안 됐을 때 그대로 두고 나중에 돈이 생겼을 때라도 복구업체를 찾아갔더라면 복구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적어도 저장된 파일 중 몇 개는 건질 수 있었을지도 몰랐는데, 오기를 부리다가, 그 오기 아래 깔려있던 나의 집착이, 그동안 찍었던 사진에 대한 집착이, 과거의 '나'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외장하드를 더 망가뜨린 것 같았다. 내 수중에 당장 복구비용 100만 원이 생긴다고 해도 복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버스에 흘린 지갑처럼 외장하드도 내게 단호하게 고하는 것 같았다. 과거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과거의 '나'는 이제 죽었다고 말이다.
고장 난 외장하드를 붙잡고 씨름하기를 몇 시간, 양손은 물론이고 겨드랑이부터 등줄기까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력서를 쓰던 중이었던 것도 잊은 채 나는 전부 사라져 버린 수천 장의 사진에 대한 미련에 스크린세이버가 띄워진 노트북 모니터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지갑을 한번 잃어버렸던 경험 때문일까, 이젠 손도 떨리지 않고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냥 허탈했다.
그렇게 멍하게 앉아있기를 한참, 문득 일본에 들고 갔던 필름카메라가 생각났다. 언니가 고등학생 때 준 그 필름 카메라도 DSLR 카메라랑 같이 일본에 가져갔었다. 비싼 필름값과 현상, 인화비용 때문에 필름 카메라를 DSLR만큼 자주 쓰지는 못했지만,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순간은 한 장, 한 장 간절한 마음으로 필름에 담고 싶어 특별한 순간에는 DSLR대신 필름 카메라를 가져가곤 했었다. 그게 생각이 나자 나는 정신없이 필름 카메라로 찍어 인화했던 사진들을 찾기 시작했다. 작년 초 이사 왔을 때 물건들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을 되짚어가며 이 서랍 저 서랍을 열다, 이사 온 후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던 가장 아랫단 서랍에서 사진 한 장을 찾았다. 일본 교환학생 때 찍은 사진이었다. 친구 B와 함께 요코하마에 갔던 때, 노을이 질 무렵 요코하마의 관람차를 찍은 사진이었다. 20살부터 몇 년간 찍은 수천 장의 사진을 잃어버리고 허탈해하던 나는 그때의 사진 한 장이 지금까지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내 곁에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비로소 안심했다. 땀에 젖은 손으로 그 사진 한 장을 쥐고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10여 년이라는 시간의 겹에 덮이고 흐려져 서랍장 가장 밑단에 묻혀있던 요코하마에서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모든 게 사라진 게 아니었다. 아직 한 장이 남아 있었다. 너무 소중했다.
요코하마에 함께 갔던 B는 나와 말이 잘 통했다. B는 디자인을 공부하는 친구였다. 미술을 공부한다는 B의 말에 '우리 언니도 미술 공부해' 하면서 처음 대화를 튼 나는 금방 B와 친구가 되었다. 취향이 비슷한 듯 달랐던 B와 나는 서로 음악을 추천해주기도 하고, 어떤 밴드가 더 대단한지 진지하게 토론을 하기도 했다. 몇 시간 동안 영화 하나에 대한 감상을 서로 늘어놓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요코하마 야경을 보고 감탄했던 것처럼 B도 요코하마 야경을 좋아할거라 생각해 B를 요코하마로 데려갔었다. 내가 필름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걸 보고, B는 요코하마에 가기 전에 급하게 하라주쿠의 플리마켓에서 단돈 500엔에 필름카메라를 사서 나와 함께 요코하마에 갔었다. 그리고 내 예상처럼 B는 요코하마의 야경에 푹 빠져 플래시도 달리지 않은 낡은 필름카메라로 삼각대도 없이 열심히 야경을 찍었다. 분명 그때 B가 찍은 요코하마 야경은 전부 흔들렸거나 아예 아무것도 찍히지 않아 그냥 필름 하나를 망쳤을게 분명했지만, 나도 B도 상관하지 않았다. 네모난 뷰파인더에 순간을 담고자 하는 그 행동 자체가 결과와 상관없이 B와 내가 그 순간을 즐기는 방식이었다.
B와 나는 요코하마 야경을 가장 잘 담기 좋은 항구 터미널에서 한참 사진을 찍고 야경을 바라보다 관광객들이 사라진 터미널 한쪽 바닥에 그대로 뻗어 나란히 대자로 누웠다. 그렇게 누워 바라본 요코하마의 밤하늘은 참 맑았다. 화려한 빛이 밤에도 사라지지 않는 도심답게 별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텅 빈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쏟아질 것 같은 별빛으로 가득 찬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만큼 좋았다. 이것저것 얘기하던 우리는 꿈 얘기를 시작했다. 누가 먼저, 왜, 어떤 대화의 흐름에서 꿈 얘기를 시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 경쟁하듯 밤하늘을 향해 꿈에 대해 열변을 토했던 기억만 난다.
"나는 지금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일러스트를 그리고 있어. 나는 그냥 계속 그림을 그리고 싶어. 그렇게 디자이너나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일을 하고 싶어. 지금은 취미로 스탠드업 코미디를 동네 코미디 클럽에서 종종 하고 있는데 그걸 더 해보고 싶기도 하고. 재밌으니까. 둘 다 큰 성공을 이루기엔 어려운 길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고 싶어."
"나도. 나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어. 영향력 있는 글을 써서 잡지를 만드는 편집장이라든가. 아니면 뉴요커나 이코노미스트 같은 잡지에 기고하는 그런 사람! 그리고 해외에서 내 삶을 개척해보고 싶어. 난 내가 태어난 곳은 선택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살아갈 곳은 내가 선택하고 싶어."
관람차 사진을 보니 자연스레 그 대화가 모두 떠올랐다. 그때 바라보았던 요코하마의 텅 빈 밤하늘, 밤 늦게까지 형형색색 빛나던 관람차, 대자로 누웠던 터미널 바닥에서 스며 올라오던 바다 냄새까지도. 해외를 떠돌았던 나의 20대의 여정의 시발점이었던 일본에서의 경험이, 특히 그 여정에 불을 지핀 B와의 만남과 대화가 모두 그 사진 안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이 사진 한 장을 찾고서 겨우 만족한 나는 비어있는 액자 하나를 집어 그 안에 사진을 넣었다.
'과거의 '나'는 아직 죽지 않았어. 그 때의 '나'는 아직 살아있어. 이 사진을 봐.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걸.'
연속으로 나를 정면에서 들이박은 현실에 반문이라도 하듯, 나는 원룸 문을 열자마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그 액자를 세워두었다. 나는 형편없는 현재의 '나'를 바라볼 수 없어 과거의 '나'를 찾았다. 꿈 많고 용기 있던 과거의 '나'. 관람차 사진 속에 박제된, 그 과거의 '나'. 그때의 나와 함께 꿈을 얘기했던 B와 다시 대화를 하면 과거의 '나'가 살아날 것만 같았다. 그러다 보면 나도 다시 무언가를 향해 전 속력으로 달리고 싶은,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잔뜩 부풀었던 그 때의 '나'가 현재로 돌아올 것 같았다. 그래서 일본에서의 만남 이후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B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한 밤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