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로 했다
세상의 소음이 잦아든 시간, 마음의 창가에 작은 불을 밝히고 비로소 나를 마주합니다.
아이가 등원하고 난 뒤의 집안은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처럼 고요합니다.
거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알록달록한 장난감들, 반쯤 마시다 만 식어버린 커피,
그리고 아침 내내 전쟁 같았던 시간의 흔적들.
평소라면 기계적으로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 바구니를 뒤졌을 테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화장실 거울 앞으로 향했습니다.
세수를 하려고 물을 틀었다가 문득 멈춰 섰습니다.
거울 속에는 내가 알던 내가 아닌, 조금은 낯설고 많이 지친 한 여자가 서 있었습니다.
푸석해진 피부, 퀭한 눈가, 그리고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질끈 묶은 머리카락.
부모라는 이름표를 달고 치열하게 살아온 훈장치고는 참으로 서글픈 모습이었습니다.
"누구 어머니, 이번엔 아이가..." "ㅇㅇ 엄마, 오늘 모임 나올 거지?"
언제부터였을까요?
세상은 나를 내 이름 석 자 대신 아이의 이름을 빌려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병원 대기실에서도, 학부모 단톡방에서도,
심지어는 가까운 이웃들 사이에서도 나는 그저 누군가의 엄마라는 부속품으로 존재했습니다.
그 부름이 싫었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를 잘 키워내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져 뿌듯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익숙한 호칭 뒤에서 '진짜 나'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거울 속의 낯선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깨달았습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던 사람이었을까?
어떤 꿈을 꾸며 밤잠을 설치고, 어떤 음악에 마음이 일렁이던 사람이었을까요.
아이의 간식 취향은 귀신같이 알아도 정작 내가 지금 무엇을 먹고 싶은지는 한참을 고민해야 합니다.
아이의 작아진 옷 치수는 매 계절 체크하면서,
내 마음의 사이즈가 얼마나 쪼그라들었는지는 살피지 못했습니다.
부모라는 이름의 거대한 그림자가 나라는 존재 전체를 덮어버린 것만 같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습니다.
거울 속의 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아주 오랜만에 내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보았습니다.
입 밖으로 내뱉는 이름이 어색해 혀끝이 간지러웠습니다.
하지만 반복해서 불러보니, 그 이름 끝에 매달려 있던 빛바랜 기억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ㅇㅇ아, 그동안 참 애썼다. 정말 고생 많았어."
나에게 건네는 이 짧은 위로가 왜 이토록 낯설고 눈물겨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부모가 되는 순간, 스스로를 뒷전으로 미뤄두는 것을 미덕이라 여깁니다.
하지만 내가 사라진 자리에서 피어난 육아가 과연 아이에게 온전한 행복을 줄 수 있을까?
내가 나로서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타인에게 행복을 가르칠 수 있을까.
오늘부터 나는 연습해 보려 합니다.
하루 중 단 10분이라도 좋으니 '누구의 엄마'가 아닌 '나'로 머무는 시간을 갖기로.
아이의 장난감이 아닌 내가 읽고 싶은 책을 펼치고,
아이의 만화 주제가가 아닌 내가 좋아했던 옛 노래를 듣는 시간.
거울 속의 낯선 이와 화해하고, 그 사람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시간 말입니다.
부모라는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먼지 쌓인 나의 이름을 다시 정성껏 닦아봅니다.
이 연재는 단순히 과거의 나를 추억하는 글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충분히 가치 있는 '나'를 찾아가는 치열한 기록이자,
나 자신에게 건네는 가장 다정한 약속입니다.
다시,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로 했습니다.
비로소 나로 머무는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거울 속의 자신에게 어떤 인사를 건네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