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라는 말 뒤에 숨겨진 나의 결핍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처럼 아이의 얼굴을 살핍니다.
밤새 뒤척이지는 않았는지, 혹시 어제 내가 냈던 짜증이 아이의 꿈속까지 따라가지는 않았는지.
입가에 맴도는 말은 사랑한다는 고백보다 "미안해"라는 사과가 먼저였습니다.
늦게 퇴근해서 미안해, 더 맛있는 반찬을 못 해줘서 미안해, 화내서 미안해.
어느덧 나는 아이 앞에서 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미안한 부모'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완벽이라는 섬을 향해 노 젓는 사공이 아닙니다. 부족한 채로, 서툰 채로,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거친 바다를 함께 건너는 동반자일 뿐입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문득 생각해보았습니다.
나의 이 잦은 사과는 정말 아이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나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한 면죄부였을까요?
깊이 들여다본 "미안해"라는 말 밑바닥에는 나의 오래된 결핍이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내가 어린 시절 부모님께 받고 싶었으나 받지 못했던 세심한 돌봄, 완벽한 환경, 그리고 전폭적인 지지.
나는 내가 가지지 못했던 그 '완벽한 그림'을 아이에게 투사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겪은 결핍을 아이에게는 절대로 물려주지 않겠다는 강박이,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미안함의 굴레'를 만든 것입니다.
결국 나의 미안함은 아이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아니라,
내 과거의 상처를 가리려는 가림막이었습니다.
내가 아이에게 사과할 때, 나는 아이를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처받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보고 있었습니다.
부모가 미안함에 절어 있을 때,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기보다 부모의 눈치를 먼저 배웁니다.
"괜찮아"라고 말하면서도 엄마의 슬픈 눈빛을 읽어내야 하는 아이는,
부모의 죄책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나누어 짊어지게 됩니다.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완벽한 환경이 아니라,
자신의 실수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단단한 부모의 등입니다.
내가 미안함이라는 짐을 내려놓지 못하면,
아이는 '부모를 늘 미안하게 만드는 존재'라는 자책감을 배울지도 모릅니다.
부모의 결핍은 때로 아이에게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가르쳐주는 빈 공간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다 채워주지 못한 그 빈자리를 아이는 자신만의 색깔로 채워나갈 기회를 얻는 셈입니다.
이제 나는 "미안해"라는 말의 유통기한을 끝내기로 했습니다.
늦게 퇴근한 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라는 말 대신
"엄마 올 때까지 씩씩하게 놀아줘서 고마워"라고 말해봅니다.
부족한 나를 보고 자책하는 대신,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아이의 손을 한 번 더 따뜻하게 잡아줍니다.
미안함이라는 짐을 내려놓은 자리에 비로소 '지금 이 순간'의 사랑이 차오릅니다.
나는 더 이상 미안한 부모가 아니라, 부족하지만 애쓰고 있는,
그래서 오늘도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충분히 좋은 부모'이고 싶습니다.
과거의 결핍이 만든 그림자에서 걸어 나와,
오늘 비치는 따스한 햇볕을 아이와 함께 온전히 누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내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임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미안함이라는 무거운 외투를 벗어던진 어깨 위로, 비로소 가벼운 봄바람이 불어옵니다. 그 바람을 타고 아이와 함께 더 멀리, 더 즐겁게 걸어가 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