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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무암 Aug 12. 2023

일출은 소원을 가져다줘

지난달 오랜만에 제주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예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숙소가 있어서 큰 계획 없이 그곳을 최대한 즐기는 걸 목표로 하고 간 여행이었다. 이틑날 저녁 숙소에서 열린 소셜클럽에 갔고, 거기서 만난 친구들과 다음날 성산일출봉에 가서 일출을 보기로 했다. 쉬러 온 여행인데, 이게 맞나?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 성산일출봉을 오를 때는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한여름의 한 낮, 대체 우리 아빠는 왜 그런 선택을 한 걸까. 그때는 엄마도 등산을 싫어하던 시절이라 아빠를 제외한 누구도 오르는 기쁨을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래도 한 번 뭔가 시작하면 끝은 내야 한다는 고지식한 생각을 가진 가족이라 모두 정상에 올랐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 정말 긴장했다.


오를 수 있을까. 나 이제 36살인데. 10살도 더 어린 친구들과 함께 오를 수 있을까. 일출은 그냥 광치기 해변에서 보려고 했는데, 신나는 분위기에 떠밀려 이런 결정을 하다니. 게다가 4시 반 출발이라니. 일어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잠을 잔 건지 눈 감고 사색을 한 건지 알 수 없는 4시간이 지났다. 알람을 못 듣고 늦잠을 자는 건지 걱정이 시작되던 때에 알람이 울렸고, 약속은 꼭 지키고 싶다는 생각으로 일어났다.


깜깜한 새벽에 간단히 준비하고 나서면서 너무 배가 고파서 올라가다 쓰러지는 것 아닌가 걱정했지만-나의 체지방을 믿지 못하는 기우였다-천천히 걸어가다 보니 뭔가 모르게 몸이 점점 상쾌해져서 배고픔을 잊을 수 있었다. 친구들과의 대화도 즐겁고, 가는 길에 점점 가까워지는 성산일출봉이 예뻐서 기대감에 힘이 난 거겠지. 실제로는 정말 깜깜한데 아이폰을 통해서 본 성산일출봉은 정말 예뻤다. 애플 최고야.


성산 일출봉 입구에 다다르자 또 한 번 걱정이 앞섰지만, 깊이 생각할 새도 없이 쭉쭉 걷고 있었다. “조금 빨리 걸어볼까요?”라고 말하는 친구의 말에 뒤처지는 순간 포기하고 싶어질까 봐 마음을 다잡고, 평지를 걷듯 계단을 척척 올랐다. 한 번 올라가 본 사람으로서 주위에서 자꾸만 들리는 “이제 다 왔다.”는 말은 절대 믿지 않았다. 내 오랜 기억을 더듬어 ‘아직 멀었어. 금세 도착하지 않는다고 실망하면 안 돼 .’하면서 찬찬히 오르는데, 점점 마을이 아기자기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광치기 해변이 얼마나 예쁘던지.


20분쯤 걸려서 정상에 도착해보니 바다에 아주 두꺼운 구름이 있었다. 전날 비가 정말 많이 와서 걱정하긴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거짓말처럼 구름이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더 두꺼운 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구름을 뚫고 해가 보이길 기대하진 않았지만, 구름의 한 가운데에 다른 곳 보다 조금 옅어 보이는 곳이 있었다. 저기에 태양의 흔적이 보일 때까지만 기다려보자.


“소원 빌어야죠! 생각해둔 것 있어요?"라고 묻자 등산을 잘하던 친구가 생각도 해본 적 없다며, 일출을 볼 때 소원을 비는 편이냐고 물었다. 글쎄, 스스로 의지로 본 일출은 3년 전 강릉에서 한 번뿐이고 그때 기도했으니 그런 편으로 하자. 사실 그때도 소원을 빌어야지 하고 간 건 아니었고, 갔는데 문득 마음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여러 번 되새긴 정도. 그런데 그때 한 생각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고,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 일출을 보면서 내 마음에 무엇이 떠오를지 궁금했다.


바닷바람이 조금 춥다고 느낄 때쯤, 강릉에서 봤던 그 뜨거운 색이 옅은 구름 뒤로 비쳤다. 열심히 사진을 찍다가 어느 순간 사진은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내 마음속에 떠오른 이야기가 있었다. 다른 생각을 떠올려 보려 해도 이것만 떠올랐다.


“나랑 좀 더 친해지게 해주세요."


태양의 흔적이 점점 옅어지는 동안 같은 이야기가 내 마음에 여러 번 맴돌았다. 이건 소원인가 다짐인가. 아니면 다독임인가. 오르기 전보다 조금 따듯한 기분으로 내려와서 올레길을 걸었다. 아기자기한 광치기 해변을 지날 때는 여러 번 성산일출봉을 돌아보며 따듯한 기분을 다시 떠올렸다.


이번에도 이루어질까? 이번에도 잊은 듯 묵혀뒀다가 후에 다시 꺼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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