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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무암 Aug 26. 2023

학습된 죄책감

수많은 매체에서 부모님에게 감사하다고 말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낀다. 나는 지금 내 인생에서 부모를 밀어내는 중이고, 눌러왔던 억울함을 표출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답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라고 말하지만, 결국 내가 숨 쉬지 못했다고 부모를 원망하는 것이기도 하다. 힘겹게 나를 길러 한 세상 살아보게 해 준 부모에게 화를 내고 있다.


나는 사랑받았는가? 내가 받은 것이, 내 부모의 노력이 과연 사랑인가?


자주 전화드려야겠다고 하는 말, 지금부터 매달 찾아가도 돌아가실 때까지 만날 수 있는 날이 한 달이 안 될 수도 있다는 말,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님의 마음을 알겠다는 말이 나를 찌른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하다. 나는 주말마다 빠짐없이 본가에 가는 것이 힘들어서 2주에 한 번으로 다시 한 달에 한 번으로 간격을 늘리는 노력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한 달에 한 번도 부모를 만나지 않는 삶을 살았구나. 나는 매일 점심시간에 점심 맛있게 먹으라고 카톡을 해야 하고, 매일 귀가 보고하며 살았는데, 평소와 다르게 조금 늦은 시간까지 집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하지 않으면 불안에 떠는 엄마의 연락을 수없이 받아야 했는데, 그들은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전화하는구나. 부모가 되어보지 않아서 어떤 마음을 아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글쎄 그들의 부모도 유리처럼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았을까.


30대가 되어서야 겨우 부모와 분리를 시도하는 나를 타인이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직업을 가지면서 본가를 떠나 거제도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내가 주말에 본가에 가지 않으면 나의 부모가 음식을 한가득 싸 들고 내가 사는 곳으로 왔다. 기숙사가 무슨 집이냐며 집에 와서 쉬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고, 이런 상황은 계속 반복되었다. 나는 이럴 거라면 나 한 명이 가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그때부터 11년간 나의 주말 일정은 항상 본가에 가는 것이었다. 주말에 같이 놀러 가자던 회사 동기들도 더 이상 주말에는 나를 찾지 않았고, 주중에 만나는 정도로만 가까워지다 멀어지는 것을 반복했다. 본가가 있는 고향 친구들도 점점 다른 지역으로 떠나면서 소원해졌다. 만나지 않아도 마음으로 이어지는 관계를 갖는 건 쉽지 않다.


“엄마는 네가 친구들도 만나고 신나게 살았으면 좋겠어.”


가끔 엄마가 이렇게 말하면 나는 많은 이야기를 삼킨다. 어릴 때부터 자주 있었던 상황이다. 부모와 의견이 다르면 최대한 설명하고 설득하다, 이내 포기한다. 그때부터는 원하던 것을 잊기 위해 노력하고, 이대로도 괜찮다고 나를 설득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부터 가족들이 요구하지 않아도 자신을 재단한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가족에게 소홀해지는 것은 아닌지 먼저 생각하고, 어떤 격한 감정을 느끼면 내가 그런 감정을 느낄만한 상황인지 먼저 검열한다. 점점 되는 것보다는 안 되는 것이 많아지고, 감정을 억제하다 못해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순간이 많아진다. 그렇게 ‘나’를 상실하고 가족을 위하며 살아가는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


잊은 줄 알았던 많은 것들이 사실 쌓이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단단했던 나는 결국 부러졌고, 그제야 나를 바라보는 연습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온전한 나 한 사람을 찾아 나선 것이다.


어떻게 합리화를 해도, 일단 나를 찾아야 부모에게 잘할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아봐도, 내가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의 사랑을 받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지우기 어렵다. 죄책감이라기보다는 부채감인가.


"내가 너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했어."


이 말 한마디면 자식은 그 부채를 어떤 방법으로도 갚을 수 없다. 태아 시절의 내가 이 세상에 나오고 싶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태어나기 전 자연유산 된 엄마의 아들도 스스로 선택해서 떠난 것은 아닐 것이다. 생겨버린 이상 태어나거나 사라지는 것을 선택할 수 없는, ‘태어나진’ 자식이라는 존재에게 왜 이 세상은 부채감을 강요하는가.


모든 사람이 태어나서 감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벅차게 행복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럭저럭 살아낼 수 있어 다행인 사람도 있다. 그리고 왜 태어난 건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긴 시간 찾아 헤매는 사람도 있다.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는 콘텐츠와 사회의 통념은 많은 사람에게 한 가지 마음가짐을 가지도록 권한다. 그 모든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을 중심을 아직 가지지 못한 나는 내면의 고통과 외부로부터 요구받는 도리로부터 도망치지 못한다.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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