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열매글방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무암 Oct 04. 2023

나의 눈, 코, 입

열매글방(10/4) : 자유주제

“눈, 코, 입을 그린다면 어떻게 그릴 것 같아요? 그리고 싶었어요? “

“모르겠어요. 이 이상 뭔가 그리고 싶지는 않았어요.”

‘나’를 그려보라는 숙제는 너무나 어려워서 2주 내내 고민을 해도 뭘 그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셀카를 찍어 그것을 보면서 태블릿에 그려보다가 극사실주의를 지향하는 나를 발견했다. 이것은 ‘나 그리기‘라기보단 ‘따라 그리기’ 일뿐이라는 생각에 그리기를 멈춘 후 무엇을 그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심리상담 전날 저녁, 종이 위에 점 하나 찍지 못하고 쳐다만 보다가 그냥 사람 모양을 그려보기로 한다. 얼굴은 동그랗게, 다음은 목, 또 다음은 어깨, 그리고.. 천천히 발까지 다 그렸다. 제법 나처럼 보인다. 채색해야겠지? 머릿속에 안개가 가득한 느낌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단단히 디딜 곳을 찾지 못한 느낌은 또 어떻게 표현하지. 그림을 못 그리니까 표현하고 싶은 나를 표현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지. 그냥 말로 설명하지 뭐. 손이 가는 색으로 채색을 하고 이쯤이면 되었다고 생각하며 멈춘다.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은 내 그림 속 나에게는 이목구비와 머리카락, 옷, 손가락이 없다. 손가락, 발가락은 자세하게 그릴 필요를 못 느꼈을 뿐이지만 이목구비와 머리카락, 옷 등은 생각지 못했다. 그릴 때는 울지 않았는데, 그림을 다시 보고 설명하면서 눈물이 났다. 대체 이 눈물은 어디서 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보고, 듣고, 말도 해야 해요. 오늘부터는 나를 그리되 눈코입을 꼭 그려봅시다.”

감정을 느끼거나 드러내는 것보다는 이성만을 강하게 따르고 있는 것 같다고, 보고 듣는 것은 나를 보호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꼭 해야 한다고. 눈, 코, 입은 또 어떻게 그려야 할까? 다시 한번 막막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전부가 아니라도 괜찮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