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글방(1/2) : 영어
그날 그 지하철은 붐비지 않고 서 있는 사람이 한두 사람 정도, 모두가 앉아있는 한산한 공간이었다. 한산한 그곳에서 여유가 없는 것은 나뿐이었던 듯하다. 주말 첫 번째 학원을 마치고 두 번째 스터디 장소로 가는 길. 그 시간 동안 나는 월요일에 학교 담임 선생님께 제출해야 하는 영자신문 독해 숙제를 해내야 했다. 오늘의 나를 믿은 어제의 나를 원망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영자신문만 쳐다보면서 독해 숙제에 적당한 기사를 찾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주변이 조금 소란스러워지고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없느냐 소리치는 것이 이어폰을 뚫고 들려왔다.
‘여기 사람이 몇 명인데, 고등학생인 내가 도울 일은 아니겠지’ 생각하고 있는데, 내 옆에 앉아계시던 분이 내 팔을 흔들면서 사람들에게 소리를 쳤다.
“이분이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요! 학생, 저기 외국인 분한테 길 설명 좀 해드려!”
당황한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나는 그 외국인 앞에 끌려 나가 있었고, 한산하던 그곳에서 가려줄 사람도 없이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는 수 없이 외국인을 보았을 때 그는 지하철 환승하는 법을 묻고 있었다. 일단 질문의 내용은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뭘 설명해야 하는지도 머릿속으로는 정리가 됐다. 다만 한국어로.
“어.. 음.. 어… 유 캔 … 파인드 ….”
외국인의 기대에 찬 눈빛은 점점 실망한 눈빛으로 바뀌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는 확성기를 통한 것처럼 내 귀에 팍팍 꽂혔다.
“아니 영자신문까지 읽는 사람이 왜 말을 못 해?” “읽고 단어만 외우면 뭐 해. 말을 못 하는데. 쯧쯧”
그래, 나는 주입식 교육 환경에서 배운 영어로는 말 한마디 못 할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주는 중이었다. 어쩌지도 못하고 더듬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어떤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분명 영어로 외국인에게 환승하는 법을 아주 정확히 설명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정말 영어를 하실 거라고 생각도 못 할 만한 외모의 아저씨가 한국인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발음으로 당당하게 설명하고 계셨다. 이건 마치 행색으로 사람에게 선입견을 품으면 안 된다는 교육 방송의 실전편 같은 느낌. 모두가 놀란 눈빛으로 나와 그 아저씨를 번갈아 보는데 수치심과 자괴감, 어쨌든 그 비슷한 모든 감정이 들어서 나는 서둘러 자리로 돌아왔다. 당황한 만큼 구겨진 영자신문은 얼른 가방 속에 숨기고, 고개를 더 푹 숙였다. 그 와중에 스터디에 늦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 지하철에서 뛰쳐나가지도 못했다.
아마 그때부터 한참을 학교며 학원에서 영어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담임 선생님이 반에 몇 명만 골라 강제로 시켰던 그놈의 영자신문 숙제도 당장 그만두겠다고 해버렸다. 대학에 갈 만큼 영어 성적은 충분히 나오니 영어만큼은 다른 공부를 하고 싶다고, 선생님을 설득하지 못했지만 일단 그만둘 수는 있었다. 정말 다행인 것은 그날의 수치심이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것이 아니라 강한 동기부여가 되었다는 것. 어학연수를 간 적은 없지만 정말 다양한 시도를 했고, 지금은 유창하진 않아도 주저함 없이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거침없던 그 아저씨를 떠올리며, 완전하지 않아도 일단 이야기하고 부족했다면 여러 번 다시 설명하기도 하면서. 그때는 정말 부끄러웠지만 그 순간 그분이 나와 같은 칸에 타고 있었다는 것은 나에게 분명 행운이었다. 그 일이 없었다면 내가 주입식 영어교육에서 탈출하는 데 얼마나 더 오래 걸렸을지 상상도 할 수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