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감함을 경계할 것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를 볼 때는 결말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비교적 호흡이 긴 드라마가 슬프게 끝날 경우 절대로 쿨하게 보내줄 수 없다. 스토리가 끝났을 때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건 한낱 시청자였던 나일뿐, 등장인물들은 어디선가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어야만 한다. 어릴 때는 예능 프로그램을 볼 때도 과몰입을 하는 바람에 <엑스맨>이나 <연애편지>에서 댄스 신고식 장면이 나오면 내가 더 창피해서 고통에 몸부림쳤다. 분야를 막론하고 일단 한 번 빠져들면 온 힘을 다해 기뻐하고 슬퍼하는 건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허구 속 비극으로 인한 슬픈 감정은 머릿속에 오래 남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건 '진짜 슬픔'과는 다르다. 대사 하나, 장면 하나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아프지만 잠도 그런대로 잘 자고 맛있는 음식도 찾아 먹는다. 말하자면 나는 그 슬픔을 소비할 뿐 경험하지는 않는다. 슬픈 영화를 보는 일은 그것이 날 다치게 할 수 없다는 확신이 있기에 가능하다. 감정 소모가 크지만 적절한 시간이 지나면 얼마든지 또 할 수 있다.
몇 년 전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갈 때의 일이다. 자신의 불행 일체를 서술한 종이를 승객 모두에게 나눠준 남자는 달리는 2호선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고 모자에 돈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대도시에서 나고 자라 아주 어릴 적부터 대중교통을 이용했기에 의도치 않게 이런 일에 매우 익숙해져 버려서, 다 읽지도 않은 종이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는 무심하게 휴대폰 화면만 쳐다봤다. 그에게 특별한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측은지심이 들지도 않았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저 흐릿했다. 사람들이 꽉 차 있는 공간에서 그만이 투명인간이었다.
물론 그 종이에 적힌 사연이 모두 진실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또한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겪었던 별별 불쾌한 경험들로 인한 나름의 생존 전략으로 방어적인 태도가 몸에 배었다. 하지만 두 시간짜리 영화 속 주인공이 가짜 피를 흘리며 죽어갈 땐 뜨거운 눈물을 한 바가지 흘렸으면서, 현실의 비극에는 이 정도로까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는 게 맞는 걸까? 별안간 지금 내 얼굴이 얼마나 무표정인지가 너무나 잘 느껴져 부끄러운 동시에 낯설었다. 그 남자가 종이를 통해 들려준 사연과 배우가 연기한 슬픔이 둘 다 가짜라면, 왜 그의 모자 속에는 천 원 한 장 넣지 않고 영화에는 별점 다섯 개를 매겼을까?
TV에 자주 나왔던 내 또래의 연예인이 세상을 등졌다. 스스로 그리 선택했다는 것 외에 다른 정보는 알고 싶지 않아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다. 어쨌든 그 사람이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 이후에야 사람들은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 얘기를 하듯이 그 이의 불행을 하나하나 캐내어 진열하고 슬퍼했다. 조그만 화면 속 댓글로, 점심시간의 가십거리로, 마치 이제 무슨 허락이라도 떨어졌다는 듯 거침없이 소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이가 흘린 피는 가짜 피가 아니었다. 몸이 죽기 전에 마음이 먼저 죽어버린 그 이의 영정사진은 아무런 대꾸가 없이 그저 평화로워 보였다.
사람은 알고 싶지 않은 걸 몰라도 될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잠시 외국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에는 모르고 싶은 걸 적당히 몰라가며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규정하고 있었으니까. 유명해져 본 적 없어 잘 모르겠지만 아마 유명세라는 건 모르고 싶은 것까지 알게 되어 마음이 피곤한 일일 것이다.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는 사회에서는 타인의 '진짜 비극'이 마치 영화나 드라마 장면처럼 납작하게 소비된다.
나는 지하철에서 만난 남자처럼 일면식 없는 타인의 슬픔에까지 마음으로 공감하는 성인군자는 못 될 것 같다. 그러나 일상에서 마주치는 '진짜 비극'에 너무 무감해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알고 싶지 않았더라도, 일단 알게 되었다면 그걸 무심히 소비해버리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