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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 Sep 21. 2021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면

즐겨야지 뭐 어떡해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곳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 기차역 옆의 한 카페다. 아마 사장님이 최근에 꽂혀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강렬한 비트의 팝송 대여섯 곡이 한 시간째 반복 재생되고 있다. 인테리어를 흘깃 보면 그가 팝송뿐 아니라 축구도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추석 연휴를 맞이하여 이곳에 있는 사찰에서 홀로 템플 스테이를 할 예정인데, ‘늦는 것보단 서두르는 게 낫다’ 라는 오랜 여행 습관이 튀어나온 나머지 입실 시간보다 무려 4시간 일찍 도착해버리고 말았다. 역 주변에 시간을 보낼 마땅한 장소가 없는 걸 알고 조금 당황한 상태로 걷다가 마주친 이 카페는 놀랍게도 내가 원하는 걸 모두 갖추고 있어 (넓은 테이블과 산미 있는 커피),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지친 사막 여행자의 눈에 비치는 오아시스처럼 그저 환영이 아닌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커피를 받으며 우연히 듣게 된 한 손님과의 대화에 따르면 사장님은 이 지역에 살고 계신 분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떤 계기로 이 조그마한 간이역 근처에 축구 유니폼이 가득한 카페를 차리겠다는 결심을 하셨을까? 무한히 반복되는 팝송을 듣다가 불가피하게 이어폰을 꽂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십 년 전의 내가 미래에 회사원이 될 줄 몰랐듯이 십 년 후의 나도 조그마한 간이역에서 와인 바를 운영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라고. 결심의 계기는 항상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다.


예술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학창 시절 친구들도 대부분 미대에 진학했다. 그중 일부는 회사에 다니고 일부는 다른 분야의 공부에 도전했으나 대부분은 아직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어디 가서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오히려 학창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는 특이한 쪽에 속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다양한 직업을 가진 친구들이 많은 것을 큰 행운으로 여긴다. 회사를 몇 년 다니다 보면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지곤 하는데, 친구들을 만나면 세상은 내 조그만 책상 한 칸보다 훨씬 더 넓은 곳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상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못 가본 길에는 미련이 남는다. 몇몇 친구들은 나의 월급과 4대 보험을 부러워하고 나는 뚝심 있게 예술가의 길을 걸어가는 그들의 용기와 자유가 부럽다. 인간은 상상력이 뛰어난 존재라서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길이 어떤 모습일지 끊임없이 상상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조금만 훑어봐도 알 수 있듯이 과도한 상상력은 불행의 씨앗이다. 그러니 불안하고 조바심이 날 땐 그 상상력을 살짝 다른 방향으로 활용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일 당장 벼락같은 기회가 찾아와 가수로 데뷔할 수도 있고 불현듯 태권도에 흥미가 생겨 성인 태권도 학원을 차리게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일상을 후회 없이 사는 방법 중 하나는 ‘어? 이거 왠지 재미있어 보이는데?’의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생각보다 재밌다거나 예상했던 것과 다르다는 실망감이 들면, 계속할지 말지에 대해서는 스스로 선택하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남이 운전하는 차를 타면 멀미가 나지만 직접 운전할 땐 그렇지 않듯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직접 운전대를 잡는 수밖에 없다. 속 편히 남의 차에 얻어 탄 채로 멀미를 해 봤자 운전자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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