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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 Sep 13. 2021

사주를 보는 이유

듣고 싶은 말은 정해져 있지만

사주 보는 걸 좋아한다. 나조차 나를 몰라서 답답한 와중에 처음 본 사람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묘하게 마음이 편해진다. 사실은 사주를 많이 본 것 치고 정작 머릿속에 남아 있는 내용은 별로 없는데, 그건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지나치게 잘 기억하는 간헐적 천재이기 때문이다. 나쁜 운세는 듣자마자 잊어버려야 한다는 게 나름의 사주 신념이다. 그렇게 좋은 운세만 잘 챙겨 나온 상태로 일주일쯤 지나면 '역시 난 잘 될 사주야'라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만 남아 당분간 조금 더 활기찬 인생을 살 수 있다. 이 정도면 사주 체질이다.


한 번은 친구와 동반 사주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서로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오랜 친구라 각자의 사주 풀이가 정확한지 객관적으로 판단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주 집은 친구의 지인이 커플 사주를 보러 갔다가 매우 만족하여 주변인에게 적극 추천했다는 곳이었다. 진짜 용한 역술가는 유명인들이 자주 찾기 때문에 접근성 좋은 곳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는데 과연 그곳은 지하철역과도 매우 가까웠다.


이 사주 집이 인상 깊을 수밖에 없었던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장장 4시간 동안 사주를 봤기 때문이다. 아무리 두 명 분의 사주풀이였다고 해도 4시간이면 거의 대학교 전공 강의와 맞먹는 분량이 아닌가. 나는 대화 시 만족스러운 리액션을 선사하는 것에 꽤나 신경 쓰는 편인데, 함께 사주를 본 친구는 나의 습관성 리액션이 "역술가 선생님을 신나게 만들어 버렸다"라고 회상했다. 선생님은 우리의 사주를 봐주는 동안 믹스 커피 5잔과 물 2잔을 마시면서 화장실을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왜 하필 사주 집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방 안은 말 그대로 열정으로 꽉 차 있었다.


자기 얘기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곤 하지만 그걸 4시간 동안이나 듣고 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새로운 길의 초입에 막 들어서게 되어 고민이 많았던 나는 이 열정 넘치는 역술가 선생님의 신비한 언변에 깊게 빠져 들었다. 현재까지의 인생에 대한 분석과 앞으로의 예측을 적절히 섞어 가며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던 사주풀이는 급기야 인생 수업 비슷한 것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중 휴대폰에 메모까지 해 두었던 다음 문장이 바로 이 날의 사주가 뇌리에 깊게 박힌 두 번째 이유다.


"당신은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사주만 봐도 알 수 있어요. 그러니 생각이 너무 많아서 힘들 땐 '그래, 그냥 내 사주가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 하고 털어 버리세요. 그게 사주를 보는 이유예요."


물론 같은 이야기를 들은 손님이 한둘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통성명 한지 4시간도 안 된 사람이 내 오랜 고민을 반으로 동강 내 버린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사실 점괘를 잘 맞춘다고 해서 중요한 결정을 대신 내려 주거나 부자가 되게 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인생의 불가해한 부분들을 좀 더 가볍게 받아들이도록 해줄 수는 있는 것 같다. 내가 이해한 '어쩔 수 없다'의 의미는 '어차피 노력해도 바꿀 수 없으니 아무것도 하지 말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생각이 많은 건 피곤하지만 어쩔 수 없고 (사주에도 나와 있다는데 뭐 어쩌겠어), 대신 생각의 양과 정비례하게 할 말도 항상 많은지라 그걸 글과 그림으로 옮겨 담으면 그런대로 스트레스가 풀린다. 나쁜 운세는 듣자마자 잊어버리듯이, 생각으로 꽉 차 복잡한 머릿속은 그저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해 버리고 오히려 할 말이 많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구구절절 빈 페이지를 채우면 그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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