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비극에 대하여
나는 주인공이 너무 큰 시련을 겪는 영화는 잘 못 본다. 타고나길 예민한 성정으로 다른 이의 감정에 쉽게 동화되는 데다가 거기서 쉽게 헤어 나오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이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거나, 소중한 사람과 슬픈 이별을 하는 장면을 보면 마치 내가 그 상황에 처하기라도 한 듯이 깊은 우울감에 빠져든다. 과장이 아니고 실제로 심장 부근에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부끄러워서 아무한테도 말은 안 했지만 최근에는 <스파이더맨:노 웨이 홈>을 보고 심장이 약간 아팠다. (마블 팬이라면 이해하리라고 믿는다.)
악역의 존재감이 너무 강한 영화도 조금은 버겁다. 현실에서는 권선징악의 법칙이 통용되지도 않고 애초에 선과 악을 딱 잘라 구분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만큼은 악역이 벌을 받고 처절하게 망하기만을 기대하게 된다. 그렇게 분노를 연료 삼아 달리다 보면 대부분의 영화는 내가 기대한 대로 권선징악의 결말을 맞지만, 그것이 썩 유쾌한 경험인가 하는 질문에는 여전히 물음표를 던지게 되는 것이다. 대리만족으로 인한 쾌감은 잠깐 뿐이고 남은 것은 타닥타닥 타고 남은 분노의 불씨뿐이다. 결국 현실은 영화와 같지 않다는 허무함이 나를 덮친다.
나쁜 일들은 현실 세계에도 이미 많다. 억울한 사람들, 슬픈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도 너무 많다. 어느새부턴가 뉴스를 틀면 들려오는 현실의 비극이 영화 속 그것보다 더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단순히 내가 보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장면을 넘겨버리거나 음소거를 해 버릴 수 없다는 점에서 영화 속 세계와는 다르다. 나는 오늘도 운 좋게 살아남은 한 인간으로서, 수많은 비극을 똑바로 쳐다보고 기억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 세계에서만큼은 어이가 없을 만큼 행복한 이야기들만 보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의 기승전결과 완성도를 위해서 주인공의 시련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 시련이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냉정히 말해,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하기만 한 이야기라면 극장에서 볼만한 영화라기보다는 놀이공원 홍보 영상에 더욱 어울릴 것이다. 시련은 마치 그림자처럼 행복이라는 빛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주고 입체감을 부여한다. 그러니까 공상과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양질의 콘텐츠를 두루 섭렵하려면 "행복한 이야기만 보고 싶다!"라는 욕망은 마음속 깊이 묻어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주인공의 시련을 지켜보며 지나치게 공감하느라 고통받는 와중에도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중간에 멈추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매번 스스로를 던져 넣는다. (이렇게 쓰고 보니 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인다는 건 인정한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별점을 매긴 영화 편수가 늘어갈수록 주인공의 시련에 맞서는 나의 면역력도 강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좋은 징조다. 나는 슬픔을 외면하지도, 그렇다고 슬픔에 무작정 휩쓸리지도 않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영화 속 가상의 비극을 잘 감당하게 됨으로써 언젠가 현실에서 마주칠 진짜 비극도 좀 더 분별 있게 대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연습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일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것이 슬픈 세상과 슬퍼하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인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