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호박고구마가 싫다.
내가 좋아하는 건 목이 막힐 정도로 푸석푸석하고 단맛이 적은 고구마다.
이것은 제법 도전적인 취향이다. 적어도 내 주변을 보면 '호박고구마 파'가 좀 더 득세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호박고구마가 맛이 없다는 건 아니다. 그런 매몰찬 표현을 사용하기엔 호박고구마는 확실히 달콤하고 부드럽다. 하지만 바로 그 달콤함과 부드러움이 내 취향과 맞지 않는다. '구황작물은 구황작물다워야 한다'는 고집을 가지고 있는 내게 이상적인 구황작물이란, 마실 것이 없으면 세 입 이상 연달아 먹기 힘들 정도로 목이 턱턱 막혀줘야 하는 것이다. 노란색도 갈색도 아닌 애매한 빛깔, 포슬포슬 흩어지는 식감, 마치 밥알을 오래 씹을 때처럼 섬세하고 은은한 달곰함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고구마의 정수다.
개인적으로는 ‘호박고구마’, 혹은 '밤고구마'라는 별명에도 은밀한 불만이 있다. 고구마면 고구마고 호박이면 호박이지, 호박+고구마일 것은 또 뭐란 말인가? 같은 맥락에서 ‘망고 포도'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샤인 머스캣도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나는 어린 시절 엄마가 시장에서 사 오시던 새콤달콤한 ‘그냥 포도’가 제일 좋다. 세상에 다른 달콤한 것들도 많은데 굳이 포도까지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포도를 먹으며 포도 맛을 기대하는 거지 망고 맛을 기대하는 건 아닌데... 아, 물론 샤인 머스캣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누가 사 주면 진심으로 고마워한 뒤 남기지 않고 먹을 것이다. 아무래도 비싸니까.
맛있는 과일과 기준 이하의 과일을 선별할 때는 달콤한 맛이 중요한 척도가 된다. 큰 마트에서는 "충분히 달지 않으면 환불해드립니다!" 같은 자신만만한 홍보 문구를 심심찮게 마주친다. 하지만 내게 그런 당도 보장 제도는 별 의미가 없다. 과일이라면 덜 단 것을, 요거트라면 무설탕을, 초콜릿이라면 카카오 82%를, 고구마라면 밤고구마를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혹여나 단 음식을 먹어야 한다면 진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반드시 곁들임으로써 단 맛을 중화해야 한다. 아, 단 맛이 나는 술도 별로 안 좋아한다. 혈관에 당분이 엉겨 붙는 느낌이 들고 머리가 아프다. 물론 머리가 아픈 건 당분이 아니라 다른 것 때문일 테지만...
사실 원래부터 이렇게 건강한 입맛이었던 건 아니다.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밥보다 간식을 더 좋아해서 젤리나 초콜릿 한 봉지쯤은 그 자리에서 다 먹어치웠다. 어쩌면 평생 먹을 단 것을 그때 다 먹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자극적인 것에 도통 면역이 없다는 걸 깨닫고 여러모로 취향이 변했다. 요즘은 달콤하고 화려한 것들보다는 은은하고 심심한 것들에 끌린다. 음식도, 옷도, 인테리어도, 심지어는 사람도. 마라탕처럼 맵고 짠 36부작 드라마보다는 밤고구마처럼 포근한 2시간짜리 영화 한 편이 더 좋다. 다소 트렌드를 거스르는 마이너한 취향 때문에 직장 동료들과 이야기를 할 때 약간 소외감이 들긴 하지만, 뭐 괜찮다. 어차피 나는 숨 가쁘게 트렌드를 쫓아가는 일에는 별로 재능이 없다.
다시 고구마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얼마 전 엄마한테서 얻어온 고구마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베개만 한 고구마를 캐 놨으니 집에 들러서 가져가라"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에이, 고구마가 무슨 베개야?" 하며 웃어넘겼던 게 무색하게도, 직접 가서 보니 정말 그건 베고 잘 수도 있을 법한 거대한 고구마였다. 심지어 하나같이 퍽퍽한 밤고구마여서 홀린 듯이 몇 개를 챙겨 와 야무지게 쪄 먹고 있다. 보통 고구마도 아니고 '베개만 한' 밤고구마를 가진 사람으로서 요즘 일상이 퍽 든든하다. 덧붙이자면 내가 고구마를 어찌나 푸석푸석하게 익히는지, 내가 쪄 놓은 고구마는 나 말고는 아무도 안 먹는다. ‘목이 턱턱 막힐 정도로 퍽퍽한 고구마 파’ 취향은 뜻밖에 고구마를 독차지하는 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
요즘 '슈붕 대 팥붕', ‘콩송편 대 깨송편’ 같은 장난스러운 음식 논쟁이 많이 보인다. 모두가 자신의 취향이 메이저라고 주장하는 모습이 꽤나 흥미롭다. 나만 어린아이처럼 편식을 하고 어른들은 아무도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는데, 겉으로 티 내지는 않아도 사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고 있었구나.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인류애가 좀 충전되고 사람들을 대할 때의 긴장감이 덜어지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밤고구마나 달지 않은 과일을 좋아하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퍽 반가울 것 같다. 우리 인간들은 사소한 취향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짙은 동지애를 느끼는 귀여운 존재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