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진심인 사람
술을 사랑하는 사람은 매일 술독에 빠져 살 것만 같고, 어떤 술자리든 간에 마치 술집의 가구처럼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 같다는 게 타당한 추론이다. 그러나 세상에 오만가지 술이 있듯이 술꾼의 유형 또한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나는 소주를 궤짝으로 마실 체력을 타고난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기본기를 바탕으로 술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 중인 애주가다.
술자리를 좋아한다기보단 술 그 자체를 음식처럼 맛있게 즐기는 편이라, 주량을 끝까지 채워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시는 일은 잘 없다. 배가 부를 때 음식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듯 이미 술에 맛이 간 상태로는 뭘 더 마셔도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애주가니 뭐니 해도 사실은 몸에 좋을 것 하나 없는 게 술인데, 어차피 마실 거라면 최상의 몸 상태와 최선의 안주 조합으로 철저히 준비하여 도합 150%의 음주를 즐기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시원한 맥주는 3일 참았다 마시는 맥주다>라는 확고한 철학을 바탕으로 매 음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다.
퍼스널 트레이닝을 받기 위해 헬스장에 처음 갔을 때의 일이다. 상담을 하면서 내게 살을 얼마나 빼고 싶은지 묻기에, “그런 목적은 아니고 체력을 길러서 술을 더 건강하게 먹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답변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트레이너 선생님과 함께 껄껄 웃은 뒤 즐겁게 운동을 시작했으나 이후 몇 개월 동안 매일매일 진수성찬을 차려 먹고 운동하러 오는 나를 본 뒤에야 그 말이 순도 100%의 진심이었단 걸 그도 깨달은 것 같다. 이왕 운동하는 거 살도 빠져준다면 나쁠 것 없지만, 정말 그게 1순위는 아니었다. 맛있는 음식들을 행복하게 챙겨 먹고 최소 주 2회 이상 꾸준히 운동을 한 결과 살이 많이 빠지지는 않았으나 (놀랍게도 조금 빠지긴 했다.) 몸의 연비가 상당히 좋아져서 이제는 체력이 방전되더라도 금방금방 충전된다. 게다가 스무 살 때보다도 주량이 늘고 숙취가 사라졌다. 정말 고무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나의 경우 술자리를 자주 가지지 않으므로 혼술이 잦은 편이다. 남들은 잠이 안 와서 습관적으로 자기 전 맥주 한 캔씩을 딴다는데, 나는 술을 마시면 오히려 잠도 잘 못 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저녁 ‘저 캔을 딸까 말까’ 고민하는 건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맛있으니까.
술병을 열기로 결심하기까지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친다. 내가 지금 저 캔을 따고 싶은 이유가 뭐지? 청량함이 필요해서? 힘들게 운동했으니까 보상심리로? 오늘 기분 나쁜 일이 있어서? 조명, 온도, 습도가 완벽해서? 왠지 그냥 취하고 싶어서?
대부분의 경우 위의 이유들 중 하나가 선택받고 술병을 여는 결론으로 끝난다. 그러나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는 두 가지 경우도 있다. 첫째는 어떤 종류든 상관없이 약을 복용했을 경우고, 둘째는 기분이 우울할 때다. 우울할 때 술을 마시면 감정 조절이 잘 안 돼서 부정적인 생각에 끝도 없이 잠식당하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접하는 산해진미도 금방 질려버리고 칼칼한 라면 한 그릇이 간절해지듯 뭐든지 적당한 게 최고의 미덕이다. 앞으로도 되도록이면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스트레스받고 적당히 먹고 마시는 평온한 삶이 오래오래 지속되길 기원하며, 오늘도 편의점 신상 맥주 한 캔을 시원하게 까며 여름밤을 마무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