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조림에서 꺼낸 감성 한 조각

이 영화를 보고 어떻게 맥주를 참아요

by 바삭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한 후 계획에 없던 휴가를 얻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큰 부작용은 없었으나 어딜 나갈 수는 없어서 오후 내내 침대에 딱 붙어 있는 사치를 좀 누렸다.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뒹굴거리다가 평소보다 느긋하게 풀어진 마음으로 <중경삼림>을 재생한 나는 정확히 십 분 후 이것이 정말 크나큰 실수였음을 깨닫게 된다.


“왕가위 영화 안 본 눈 삽니다”의 “안 본 눈”을 담당하고 있던 나는 이전까지 홍콩 영화에 조예가 깊지 않았다. 2019년 홍콩 여행을 갔을 때도 문화적 인풋이 별로 없었던 탓에 감동까진 느끼지 못했고, 그저 맛있는 음식들과 함께 즐겁게 여행한 기억뿐이었다.

시간은 흘러 2021년. 넷플릭스와의 끈끈한 우정에 살짝 권태기가 온 걸 핑계로 왓챠 구독을 시작한 김에, 주변에서 나만 홍콩영화 안 본 것 같아서, 눈이 부시게 빛나지만 어딘가 처연하고 나른한 그 유명한 청춘에 감성을 좀 적셔보고자, 대학 시절 자주 가던 펍의 이름이기도 한 <중경삼림>을 시작으로 왕가위 영화 정주행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늦은 시간 내 방의 편안한 침대와 적당한 밝기의 노란 조명, 금성무의 반짝이는 젊은 시절, 일어나서 박수라도 치고 싶은 배경음악… 두말할 것도 없이 황홀한 영화였으나 동시에 하필 지금 이걸 보고 있다는 사실이 비극이었다. 도저히 술을 참을 수가 없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의 아련한 눈빛과 소름 돋는 영상미를 감상하는 동안 나 역시도 처연하고 아련한 눈빛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손길로 ‘백신 접종 술’, ‘백신 접종 후 술’ 따위를 검색하다 현타가 와서 그만뒀다. ‘지금까지는 괜찮지만 자다가 아파서 타이레놀을 먹어야 할 수도 있고… 이 시국에 여러 사람이 고생하고 있는데 이깟 유혹에 굴복하는 것도 한심한 짓인 것 같고…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내 몸인데 만에 하나 잘못되면 내 책임이지…’ 등등 아무리 생각해도 먹지 말아야 할 이유가 더 많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직 개시도 안 한 위스키와 시원한 맥주를 눈앞에 두고도 참는 데 성공했고, 어제와 같은 불상사를 막기 위해 오늘 낮에는 부리나케 편의점으로 달려가 무알콜 맥주를 넉넉히 사 두었다. 어제는 따뜻한 차와 함께했다면 오늘은 시원한 탄산수, 그리고 무알콜 맥주와 함께 잠시 홍콩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다. 아직 안 본 영화와 안 읽은 책이 산더미처럼 많다는 사실이 어찌나 다행인지, 새삼스럽게 마음이 든든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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