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삭 Mar 28. 2023

한라봉 먹는 행복한 삶

택배가 도착했습니다.

한라봉 보내주는 친구도 있고, 이토록 시큼한 과일을 문제없이 씹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잇몸도 건강하다니 꽤나 평온한 삶이네, 같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토요일 오후, 생일 축하한다며 친구 K가 보내 줬던 한라봉을 아침 겸 점심으로 먹었다.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게 귀찮아 좀처럼 사 먹지 않는 과일이었다. 박스가 가득 찰 정도로 커다란 한라봉은 그 크기만큼이나 맹렬한 기세로 온 방안에 상큼한 향을 퍼뜨렸고 입안에도 자꾸만 침이 고이게 만들었다. 과일 한 개 먹고 배가 부른 스스로가 낯설어 얼떨떨하게 앉아 있다가 자연스럽게 친구 K를 떠올렸다. 한라봉 보내주는 친구도 있고, 이토록 시큼한 과일을 문제없이 씹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잇몸도 건강하다니 꽤나 평온한 삶이네, 같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예쁘고 탐스러운 한라봉은 그냥 먹기가 왠지 아까워서 껍질을 까기 전 사진을 찍어 K에게 보냈다. 덕분에 비타민 충전하고 다음 주도 힘내서 출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나를 다 먹어갈 때쯤 도착한 답장은 조만간 보자는 문장으로 끝났다. 각자의 일에 치여 절대로 조만간 볼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우리 둘 다 그 말을 딱히 거슬려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K와 내가 나눠 먹은 음식을 하나하나 나열하자면 꽤 긴 목록이 완성될 것이다. 음식을 나눠 먹는 건 아주 어릴 때부터 배우는 사교 행위니까. 우리는 같이 매점에 가거나 떡볶이를 먹는 사이로 처음 만나 같이 술 한 잔 기울이는 사이로, 그다음에는 서로의 집으로 음식 택배를 보내는 사이로 변해 왔다. 둘 다 할머니가 된 이후에는 영양제나 건강식품 따위를 주고받으려나. 이왕이면 그때도 우리가 좋아하는 과일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기후 변화로 몇몇 과일을 못 먹게 될 수도 있다는 소문 때문에 매우 불안한 심정이므로), 내 치아와 위장도 그걸 씹어 삼킬 수 있을 정도로만 오래오래 튼튼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내가 누군가에게 보낸 택배들을 가만히 떠올려 본다. SNS 선물하기 기능을 통해 보낸 게 대부분이라 아주 깊은 고민이 담기진 않았어도, 나름대로 의도를 담아 고른 선물들이었다. 어떤 이에게는 이런 방식의 선물하기가 성의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쓸데없이 바쁜 현대인의 생활 패턴을 고려했을 때 잠깐이나마 시간을 내어 상대를 위한 물건을 고르는 일도 어찌 보면 엄청난 호의인 것이다. 약간의 과대포장 그리고 설렘과 함께 도착했을 택배 상자들. 그걸 받은 이들도 종종 내 생각을 할까?

매거진의 이전글 자세가 사람을 만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