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에 단어를 붙이면 놀라운 힘이 생긴다. 나만 겪은 줄 알았던 사건, 나만 느끼는 줄 알았던 감정에 명칭이 있음을 알게 된 순간 개인적인 경험은 보편적인 현상이 된다. 나처럼 경계심 많은 사람은 보편의 범주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을 느끼는 법이다. 그런 맥락에서 요즘 유행하는 MBTI 검사의 순기능 중 하나는 내향적인 사람들이 더 이상 스스로를 ‘비정상’으로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거라고 생각한다. ‘집 밖에서 하루를 보내면 집 안에서 이틀은 쉬어줘야 해요.’라는 문장을 ‘저는 I입니다.’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A, B, O, AB의 시대는 가고 이제는 I와 E만 알면 되는 시대다. 그 누가 예상했을까?
단어 붙이기의 마법은 병원에서도 통한다. 병원에 찾아가 “새벽 내내 배가 쥐어짜듯 아팠어요. 상한 음식을 먹은 건 아니에요. 딱히 화장실에 가고 싶지도 않고…” 등등의 호소를 쏟아내면 의사 선생님은 ‘위경련’이라는 간단명료한 세 글자로 나의 증상을 정의해 준다. 왠지 전문적인 느낌이 들어 쉽게 수긍하고는 병원을 나선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내게 병원이란 그 전문적 느낌을 풍기는 단어를 알아내러 가는 곳이다. 물론 병을 얻는 건 절대 유쾌한 일이 아니다. 때로는 병명을 알더라도 딱히 손쓸 방도가 없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하지만 모르고 걱정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알고 걱정하는 게 덜 공포스럽다는 생각이다. 무지는 지나친 두려움을 낳는다.
요즘 들어 자주 생각하는 단어는 ‘시절인연‘이다. 본래는 ‘모든 사물의 현상이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는 말을 가리키는 불교용어인데, 지나갈 인연은 지나가고 만날 인연은 만나게 되어 있다는 의미로 폭넓게 쓰인다. 자주 허탈하고 우울한데 그 이유를 몰라 답답했던 시기, 책을 읽다가 우연히 그 단어를 접하고는 불현듯 깨달았다. 내가 느끼는 이 기분은 그리움과 아쉬움, 그리고 후회의 종합체라는 걸 말이다. 누구보다 가까웠으나 이제는 안부도 물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을 향한 그리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아쉬움, 항상 핑계만 가득했던 내 행동에 대한 후회가 한데 뒤섞인 감정. 하지만 그 모든 게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거라면, 붙잡아두고 싶은 사람이 계절처럼 지나가버리는 게 당연하다면, 굳이 아쉬워하며 애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나만 이런 마음을 안고 사는 건 아니니까.
시절인연이라는 단어를 주문처럼 중얼거리는 날이 많아졌다. 처음 알게 된 단어도 아닌데 그렇다. 아직 내 인생에는 너무 많은 만남과 이별이 남아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