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차 아마추어의 길

아직도 할 말이 남았나요?

by 바삭

편지를 길게 쓰는 건 어렵다.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예외는 없다. 수신인을 밝히고 (김개똥에게.) 안부를 물은 후 용건을 적고 나면 (안녕? 난 너의 친구 김말똥이야. 생일 축하해.)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이 없다. 맞장구 쳐줄 상대 없이 혼자서 구구절절 편지지의 여백을 채워 나갈 자신이 없어진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엄지를 치켜드는 것처럼 기본적인 비언어적 리액션조차 없이 한 장을 힘껏 채우고 있노라면 마치 오디션 현장에서 무반주로 랩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부터 내가 쓰는 편지는 글 반, 그림 반이었다. 편지를 받는 주인공의 얼굴을 대문짝만 하게 그려 넣어 공간을 채웠다. 순수미술을 전공한 건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그림은 좀처럼 시작하지 않는다. 글을 오래 읽는 건 전혀 어렵지 않지만 정작 긴 글을 쓰는 건 어렵다. 남의 말을 오래 들어줄 수는 있지만 오래 말하기는 싫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릇이 어느 순간부터 텅 비어버려서 더 이상 내보일 게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부끄럽다.


직장에서도 한 프로젝트를 오래 붙들고 있으면 흥미가 후드득 떨어지는 건 마찬가지다. 그러나 대감집 사노비로서 감히 대감님 얼굴에 먹칠을 하여 밥줄이 끊기면 아니 되므로 얌전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일한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프로의 기준은 그걸로 밥을 벌어먹고 사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나는 10년이 넘게 미술을 공부했지만 지금 미술로 돈을 벌고 있진 않으니까, 말하자면 13년 차 아마추어 예술가이자 3년 차 프로 회사원인 셈이다.


갓 뽑아낸 따끈따끈한 업무 자료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퇴근해 도무지 채색될 기미가 안 보이는 내 그림들을 보면 괜히 찝찝하다. 정신 상태가 안 좋은 날은 인생이 통째로 잘못 흘러가고 있는 느낌까지 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퇴근 후 당장 붓을 들지 않더라도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기에 일단은 내일로 미루고 맥주 캔을 따거나 침대에 눕는다. 내 예술의 원동력은 스스로의 깃털 같은 채찍질뿐인데 매주 기획서를 뽑아낼 수 있는 원동력은 타인의 매서운 채찍질과 달마다 꽂히는 월급이니 이건 마치 Level 1 짜리 초보 플레이어와 끝판왕 간의 싸움인 것이다.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남겨둘 때 가장 즐겁다고들 하지만 힘을 뺀 취미생활이 가끔은 영 재미가 없다. 월급 받는다고 배가 불러 더 이상 예술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거지 싶다가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영감과 희망이 여전히 날 붙든다. '하기 싫다'와 '그래도 해야지'로 점철된 아마추어 예술가의 길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살포시 스스로를 채찍질해 본다. 친구를 기쁘게 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꾸역꾸역 채워 보냈던 편지지처럼, 내 마음속 그릇을 가득 채우고야 말겠다는 희망 하나 붙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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