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집에 내려앉은 먼지의 소감

by 바삭

새로 이사한 집에는 해가 잘 든다. 완전한 남향까지는 아니라고 했는데, 남서향 혹은 남동향이었나? 집을 계약할 때 부동산에서 말해준 것들은 어쩐지 1/10 정도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중요한 내용이었을 텐데!) 어쨌든 침실에는 가로 240cm짜리 큰 창이 있어, 해가 뜨고 지는 실황이 아주 잘 보인다. 몇 시쯤이면 해가 어슴푸레하게 밝아지는지 알게 된 것이 낯설고 반갑다.


햇살이 반갑다고 방금 말해놓고는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게 좀 머쓱하지만, 어젯밤에는 블라인드를 주문했다. 이른 새벽부터 눈이 부셔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은 원래 일출과 함께 자연스레 깨어나도록 설계된 건가? 해가 잘 안 드는 집에서만 살아본 나는 태어난 지 30여 년 만에 내 몸을 낯설게 느낀다. 권장 수면량을 채우지 못한 게 분명한데도 얼렁뚱땅 깨어나 침대에서 사색하는 날이 며칠간 이어지고 보니, '아! 그래서 사람들이 암막 커튼이라는 걸 치고 사는 건가?'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가로 240cm짜리 주문제작 블라인드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도 어김없이 5시에 눈을 떴다. 다시 잠들면 더 피곤할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의미 없는 동영상들을 보며 시간을 허비하기는 싫고 해서 차라리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기지개를 켜고 따뜻한 물을 마시고, 전등을 켜지 않아도 적당히 밝은 집의 조도가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면서, 자연광에 의존해 어제 빨래해 널어놓은 수건을 개고 책상 앞에 앉았다.


'이사'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노란 해가 비스듬히 들어오는 방에서 먼지를 터는 풍경이 떠오른다. 나는 공격을 받은 먼지. 잔잔한 일상에 큰 파동이 생기자 먼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공기 중을 부유한다. 본래 있던 자리에서 필연적으로 조금은 떨어져 있을 어딘가에 다시 자리 잡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빨리 내려앉고 싶다고 재촉할 수도 없다. 붕 떴던 무언가가 다시 내려앉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내가 내려앉는 데 필요한 시간은 2주에서 3주 정도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시간이 흐르기 전까진 무얼 어찌해도 새 공간이 ‘집’이라는 생각, 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빨리 적응하고 자잘한 숙제를 모두 처리해 버리고 싶어 안달하던 지난 2주간의 경험으로 알게 됐다. 새 공간은 당연히 많은 것이 부족하고, 낯설고, 때로는 불편했다. 그러나 단지 노력한다고 해서 한순간에 그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필요한 건 시간, 오직 시간이었던 것이다.


다시 햇빛 얘기로 돌아오자면, 그동안 ‘미라클 모닝’에 지겹도록 실패했던 것은 해가 안 드는 집에 살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과거에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들, 예를 들면 햇빛, 규칙적인 수면과 운동, 식물을 옆에 두는 것, 향기 나는 잠옷을 입는 것 등이 해가 지날수록 점점 중요해진다. 십 년 뒤의 나는 또 다른 것들을 소중히 품에 안아 가꾸고 있을 거다. 먼지처럼 자리를 옮겨 다니는 존재가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그 어떤 것도 쉽게 단언하기가 어려워졌다. 이쯤에서 "모든 것을 흘러가는 대로 맡기고 즐기자" 같은 교훈이 나와야 어울릴 것 같은데... 나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힘 좀 빼자고 백 번 다짐한 뒤 백 번 실패하고, 이사할 때마다 별 쓸모없는 물건들까지 바리바리 챙겨 다니고...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니 6시 30분이 훌쩍 넘어가고 있다. 이제야 아침이다. (방금 전까지는 새벽도 아침도 아닌 무언가였다.) 주말 내내 비가 온 뒤 맞이하는 5월 중순의 아침 공기가 제법 깨끗하게 느껴져서, 가로 240cm짜리 창을 양쪽으로 활짝 열었다. (이 맛에 월세 내지!) 빨간 벽돌과 빨간 지붕들이 보인다. 그 외에 전깃줄과, 전깃줄에 얼기설기 엉켜 있는 거미줄, 맞은편 집 옥상에서 키우고 있는 이름 모를 꽃과 나무, 아주 옅은 색의 하늘, 길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소리, 멀리서 들리는 오토바이 소리,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는 작은 새소리. 모르고 살았던 아침 6시 30분의 풍경이다. 포근하지만은 않은 아침 공기에 새로 꺼낸 반팔 잠옷 아래 피부가 약간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새삼 ‘평화’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아침을 사랑하는 어떤 이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또한 이사로 인한 변화일 거라고 고개를 끄덕여본다. 이렇게 나는 조금씩 다른 곳에 내려앉는다.


202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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