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의 메모 모음
07:50
다시 줄이어폰 사용자로 돌아왔다. 에어팟이 고장 났기 때문이다. 무선 이어폰의 발명을 중학교 시절부터 갈망해 왔고 그것이 실제로 출시되었을 때 누구보다 환호했지만, 고장 났을 때 새것을 턱턱 살 수 있는 가격이 아니라는 게 무선 이어폰의 최대 단점이다.
그리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 두 가지. 줄이어폰을 쓰면 힙스터 취급을 받는다. 어느 시대든지 다수와 다르게 행동하면 대체로 힙스터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모두가 폴더폰 쓸 때는 스마트폰 쓰는 사람이 힙스터였고, 모두가 스마트폰 쓰는 지금은 폴더폰 쓰는 사람이 y2k 감성 장인으로 추앙받듯이... 또한 줄이어폰은 생각보다 편하다. 물론 마라탕 먹고 난 다음날의 위장처럼 배배 꼬인 줄을 풀고 있노라면 답답해서 가슴을 치고 싶지만, 충전 상태를 점검하며 매번 이어폰을 어르고 달랠 필요 없이 휴대폰 단자에 꽂기만 하면 노래가 나온다니(!) 기술의 발전이란 때론 허무한 면이 있다.
09:20
정수리에 흰머리가 몇 가닥 있는 것이 상당히 눈에 띈다. 나는 요즘 그걸 가르마 타는 이정표로 쓰고 있다.
10:30
어떤 책을 감명 깊게 읽고 나서 글을 쓰다 보면 무의식 중에 그 작가의 말투를 따라가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이런 일은 대화할 때도 자주 벌어지는데(상대방의 말투나 제스처를 따라 한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이게 거의 타고난 성향이라 쉽게 바뀌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 그러므로 나는 기를 쓰고 좋은 사람들 곁에 붙어 있어야 한다.
15:30
20살 된 노묘를 키우는 선배에게 '고양이 튼튼' 부적을 선물했다. 나는 이럴 때만 신을 믿는다. 뭔가 바라는 게 있는데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
18:20
집에 들어서기 전에 현관 비밀번호를 되뇌는 습관이 있다. 5년째 거의 같은 비밀번호를 사용하니 까먹었을 리는 없는데도. 뭔가를 잊었을까 봐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인가?
19:30
필리핀 선생님과 화상영어 수업을 하는데, 선생님은 내가 너무도 어려 보인다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정말로 어려 보여. 왜인지 알아? 계속 웃고 있거든.”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웃음은 노화를 멈춰주지!”
사실은 어색해서 웃었다.
22:00
엄마랑 통화하며 최근 출간한 내 에세이 <귀여움수집가> 얘기를 했다. 나는 책 곳곳에서 엄마의 에피소드를 (사전 동의 없이) 이용해 먹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소리 들었다. "너 엄마가 술 먹다가 일출과 함께 잠들었던 과거를 까발려 버리면 어떡하니? 나 요즘 얼마나 조신하게 살고 있는데." 나는 "글 쓰는 딸을 낳은 엄마 탓"이라며 뻔뻔하게 응수했다. 사실 잔소리라기엔 애정과 자랑스러움이 듬뿍 묻어 있었다. 내 책을 가장 많이 사서 주변에 선물한 사람이 엄마다.
202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