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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다 빨라 인간세상

by 바삭

회사 업무 때문에 어느 마트 무인 계산대 근처에 한참을 앉아 있던 적이 있다. 물건을 계산하고 나가는 사람들을 흘깃흘깃 쳐다본 지 2시간 정도가 지나자 연령대에 따른 행동 패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들은 보통 무선 이어폰을 착용하고, 장바구니나 카트 없이 한두 개의 물건을 품에 끼고 온다(혹은 나처럼, 원래는 한두 개만 살 계획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되었다는 듯 양손 가득 곡예사처럼 물건을 들고 오거나). 결제는 실물 카드와 모바일 결제가 반반. 카드는 휴대폰 케이스나 주머니에서 쏙쏙 빠르게도 잡혀 나온다. 결제 방식 같은 건 이미 알고 있으므로 안내 직원도 필요 없다. 가끔은 영수증도 버려두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탓에, 영수증이 필요하시냐고 예의 바르게 묻는 기계 목소리만 허공에 흩날릴 뿐이다.


반면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속도는 눈에 띄게 낮아진다. 화면의 모든 글자를 꼼꼼히 읽고 신중하게 각 단계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가방 깊숙한 곳에서 지갑을 꺼내 계산을 마치고 물건과 영수증과 할인 쿠폰을 챙겨 빠져나간다. 알뜰하고 실용적인 노인들은 각양각색의 장바구니(바퀴 달린 것, 의자로도 쓸 수 있는 것, 백팩 겸용 등등)를 끌고 나타나는데, 그게 어찌나 편리해 보이는지 구매처를 묻고 싶어질 정도다.


하지만 그들에게 언제까지나 ‘느림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격 급한 직원이 주변에 있을 경우, 혹은 주변이 조금 붐빌 경우 가차 없이 도움의 손길이 들어온다. 도움의 손길을 거절했던 한 할아버지는 결국 혼자서 계산을 끝마치고 퇴장했다. 꼿꼿한 뒷모습에서 그의 자존심이 무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요전에 한 키오스크 앞에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그런데 너무 빨리 누르지 말고 나 좀 가르쳐 줘요. 아가씨 같은 사람 없으면 다음엔 혼자 해야지." 하시던 할머니가 떠올랐다. 이제는 혼자서 계산을 잘하시려나.


세상이 이렇게 빨랐다니. 돈 내고 물건 사는 게 이렇게까지 빨라야 하는 일이었을까? 그들의 ‘눈치 보이는 느릿함’을 지켜보며 문득 깨달았다. 너무 많은 사람들을 승강장에 남겨 둔 채로 세상이라는 기차가 떠나 버린 것이다. 기차가 사람을 기다려 주는 게 아니라 사람이 기차를 쫓아가느라 숨을 헐떡인다. 나 역시 느린 사람들을 무심코 타박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은데, 생각해 보면 그들이 꼭 빨라져야 할 이유도 없다. 요즘 시대에 ‘기다림’이라는 건 거의 7대 죄악 중 하나가 된 것 같다.


나는 오늘도 숨을 헐떡이며 기차에 올라탔다. 모든 것이 정확히, 기다림 없이 진행된 하루였다. 출근길 지하철은 정확히 8시 12분에, 점심시간은 11시 20분에. 점원 앞에서 적립 카드라도 찾을 때면 죄인이 되어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그런 하루를 마치고 아직까지는 탑승객이라고, 내겐 티켓이 있다고 안도하며 자리에 앉아 글을 쓴다. 누구 하나 기다려주지 않고 1분 1초를 억척스럽게 아낀 매일의 끝자락에서 나는 무얼 하나. (유튜브로 먹방 보기?)


내일도 모레도 기차가 멈추는 일은 없겠지만, 또 어떤 사람은 남겨지고 어떤 사람은 올라타 안도하겠지만, 승강장에 남은 사람들에게 너무 불친절하지는 않은 세상이기를 바라본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뒤에 남겨지게 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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