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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을, 병원에서의 메모

by 바삭

스스로를 잘 챙기는 것도 사랑의 표현

엄마의 건강검진 날, 보호자 자격으로 함께 병원에 왔다. 고령의 환자가 수면내시경을 할 때는 보호자 필수 동반이라고 한다. 병원에 사람이 많아 1시간 이상을 기다리면서 산문집 한 권을 완독 했다. 왠지 손이 안 가서 그동안 펼치지 않던 책이다. 그러고 나서도 시간이 남아 휴대전화로 각종 생필품을 주문해 엄마 집으로 배달시키고, 이런저런 메모를 하고, SNS피드를 끊임없이 새로고침 하다 보니 마침내 엄마가 마취에서 깨어났다. 회복실에서 씩씩하게 걸어 나오는 엄마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다가 문득, 내가 사랑하는 저 사람이 제철 채소를 요리해 냉장고를 꽉 채워두고, 의사 선생님이 하지 말라는 짓은 하지 않고, 각종 약을 잘 챙겨 먹는 사람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들은 셈 칠 예정인 대화

토요일 오전의 내과는 매우 분주했다. 건강검진 때문이다. 평일에는 시간을 내기 힘든 직장인들이 특히 많았다. (나는 사람이 많은 게 싫어 연초 일찌감치 건강검진을 끝내 놓는 편이다.) 잠이 덜 깬 데다가 공복 상태라서 묘하게 힘이 없는 사람들이 안내받은 대로 고분고분 움직이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으니 왠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중에 한 중년 남성과 직원 사이에 가벼운 언쟁이 있었다. 남성 측의 주장을 요약하면, 본인이 아침 식사를 하고 왔는데 안 먹은 셈 치고 그냥 검사를 하면 안 되냐는 거였다. 담배도 한 대 피웠다는 이야기를 조그맣게 덧붙이면서. 저 아저씨는 검사에서 안 좋은 결과가 나와도 안 본 셈 치면 되니 스트레스 안 받고 오히려 건강할 것 같다.


믿을 구석

검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두 시간 가까이 의자에 앉아 있으려니, 마치 이 병원의 화분 중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모두가 내 존재를 느끼고 있긴 하지만 딱히 신경을 쓰진 않는... 말이 ‘보호자’ 일뿐 딱히 중요한 역할이 있는 건 아니어서 더욱 그렇다. 그래도 병원 로비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보호자’의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엄마의 마음 한구석이 좀 더 편해질 순 있을 거라고 기대해 본다.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갈 때마다 내 기분이 그랬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는 하지만, 낯선 검사 기계들 사이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몸에 걱정의 냄새가 엉겨 붙으니까.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힘이 나곤 하던 그 시절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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