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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번호를 올바르게 입력하세요

by 바삭

시간을 달리는 직장인 (feat. 디지털 치매)

하루는 바쁘고, 일주일은 길고, 한 달은 빠르게 지나간다. 분명 설이었는데 정신 차리면 추석이다. 직장생활을 하며 깨달은 신비로운 시간의 법칙이다. 나는 사소한 걸 과장해서 말하는 희한한 개그 코드를 갖고 있는데, 예를 들면 시간이 너무 빠르다고 말하고 싶을 때 '이러다 칠순잔치 하겠네요' 하는 식이다. 이렇게 시간을 달리는 화법을 쓰는 사람에게도 주기적으로 놀라움을 선사하는 사건이 있으니, 바로 회사 컴퓨터 계정의 <비밀번호를 변경하세요> 팝업 알림. 내가 다니는 회사는 정보 보안에 상당히 민감해서 3개월마다 비밀번호를 바꾸라는 알림을 보내는데, 그걸 볼 때마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아니, 벌써 3개월이 지났다고? (그리고 분기 운영 계획안을 또 써야 한다고?)

나는 보통 자동 로그인 설정을 해 두기 때문에 새로 로그인할 일이 없다. 그렇게 수개월간 한 번도 내 손으로 입력하지 않은 '현재 비밀번호'는 자연스레 기억에서 잊힌다. 비밀번호를 변경하기 위해 비밀번호 찾기를 누르고, 인증 번호를 받고, 새 비밀번호를 입력하니 현재 비밀번호와 같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단다. 아, 이것이 제 현재 비밀번호였군요. 어쩐지 좀 익숙하다 했더니만... 그렇게 나는 3개월 전 나와의 심리 게임에서 또다시 패배했다.


거짓의 삶

출퇴근 지하철에서 항상 책을 읽는다. 올해부터는 #오늘의출근책이라는 해시태그로 꾸준히 인스타그램 포스팅도 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 왕복 두 시간의 출퇴근길을 아깝지 않게 쓸 수 있고, 무엇보다 출근 전후의 자아를 갈아 끼우는 데 아주 효과적이다. 며칠 전에는 퇴근 독서 의식을 방해하는 업무 연락에 표정이 굳었다가도 메신저에 파란불을 켜 놓은 채로 성실히 답변을 했다. 상대방의 '퇴근하셨는데 죄송해요ㅠㅠ 감사합니다.'에 '아닙니다 언제든 연락 주세요!'로 대답하며 대화를 끝내고,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무심히 들여다본다. 물론 진짜로 ‘언제든’ 연락을 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고 '네, 이번 한 번만 사과를 받아 주겠습니다. 다신 이러지 마세요.'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출근길에 꽉 채워 나온 내 인내심 주머니는 헨젤과 그레텔의 빵가루마냥 줄줄줄 흘러내려 퇴근길엔 온데간데없지만, 그래도 밑천을 드러내면 안 된다. 안 그러면 후회한다.


퇴근 중인 직장인을 건드려선 안 돼

매일 지하철을 타다 보면 꽤나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게 된다. 서울살이 3n 년 경력으로 이제 웬만한 '이상함'에는 눈길조차 안 주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의 사건은 순위권에 오를 만했다. 어떤 건장한 성인 남성이 "내가 앉을래! 나 앉고 싶어!" 하며 바닥에 주저앉아 생떼를 부려 그 앞의 승객을 진저리 치며 도망가게 만드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내가 같은 일을 당한 것이다. 심지어 이번에는 내 어깨를 잡고 끌어내리려는 동작을 취하기까지 했다. 무서운 세상에 괜한 일을 당할까 봐 눈도 안 마주치고 일어나 다른 칸으로 도망가면서, 억울함 10%+ 분노 90%의 감정을 삼키면서, 동시에 그의 놀라운 솔직함에 어안이 벙벙했다. 사회적 합의(지하철에서 이미 앉아 있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내지 않는다)를 산산조각 내는 저 엄청난 기세! 만일 내가 사무실 바닥에 주저앉아 "집에 갈래! 집에 가고 싶어!"라고 외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렇게 엇나간 생각을 한 걸 보니 아무래도 이 날 하루가 좀 고되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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