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리는 거꾸로 해도 이효리인데
초등학교는 서로를 놀리지 않으면 안 되는 규칙을 공유하는 작은 악마들의 사회였다. 사소한 특징도 꼬투리를 잡아 기어코 별명으로 만들곤 했으며 이름은 그중에서도 단골 소재였다. 특이할 게 없는 이름이라도 문제없다. 전 씨면 전봇대, 송 씨면 송사리. 그저 어휘력만 조금 발휘하면 된다. 우리나라에 몇 없는 성씨를 갖고 있는 한 친구는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할 때면 마치 전쟁에서 돌아온 장군 같은 표정을 짓곤 하는데, 그러면 겨우 '신라면', '매울 신' 정도가 치욕의 전부였던 나는 숙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위로의 눈길을 보낸다.
흔치 않고 멋진 이름을 가진 사람이 정작 그 사실을 달가워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학창 시절 놀림받는 건 물론이고 다 커서도 지긋지긋하게 이름을 정정해 주어야 하기 때문일 거라 추측해 본다. ("희가 아니라 휘요. 이휘재 할 때 그 휘요.") 하지만 평범한 이름을 가진 나는 평범한 게 지긋지긋했다. 주인공이 되고 싶은데 내 이름은 그냥 주인공 친구 같았기 때문이다. 짱구는 이름도 짱구고 철수는 이름도 철수다. 나는 철수가 아니라 짱구가 되고 싶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TV와 신문 속 화려하게 반짝이는 세상을 동경했고 밤마다 그 세계에 속하는 상상을 했다. 아티스트는 죽어서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데 지독히도 평범한 내 이름으로는 턱도 없을 것 같아 시작도 하기 전에 기가 죽었다. 길거리에서 내 이름을 부르면 최소 세 명쯤은 자기를 부른 줄 알고 돌아볼 것이 분명한데, 도대체 누가 그 이름을 기억해 준단 말인가?
이름이 처음 태어났을 때로 돌아가 보자. 이름이야말로 부모와 자식 간에 존재하는 유대의 첫 구체적 증거다. 부모는 정성스레 이름을 지어 주며 자식의 행복과 안녕을 빈다. 그러나 이렇게 지어진 이름은 정작 평생을 그 단어로 불리게 될 사람의 취향과는 전혀 관련 없다는 점에서 피할 수 없는 굴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마치 이소라 7집 수록곡 <track9>의 첫 소절처럼.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름으로 불렸네.
사람의 인생은 그 이름을 따라간다고 한다. 할머니는 타고난 기가 약한 사람의 이름에 '산'이나 '바다'처럼 거대한 자연물이 들어가는 건 좋지 않다고 믿었다. 하지만 내 이름을 내가 직접 지을 수 있었다면 바로 그런 식의 거대한 이름으로 정했을 것 같다. 이름에 바다가 담겨있다는 이유로 거친 파도처럼 살게 된다니, 이보다 예술가다운 이름이 있을까?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그 이름이 내게 전혀 어울리지 않을까 봐 조심스럽다. 나는 이미 내 평범함에 적응해버렸다.
요즘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이름을 지어 부른다. 연예인이 아니어도 예명을 쓰는 게 어색하지 않다. SNS를 열심히 하는 지인들은 인스타그램 아이디가 마치 이름처럼 느껴진다. 사실 우리는 집과 회사에서, 가족 앞과 친구 앞에서 각각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므로 이름도 바꾸어 쓰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다. 나만 해도 언젠가부터 몇 개의 다른 이름들을 나와 동일시하고 있다. 이름이 많아진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젠 예전만큼 내 이름이 싫지 않다. 살다 보니 어딜 가도 임팩트 없는 나와 어딜 가도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내 이름은 아주 잘 어울리는 듯하다. 나서기 싫어하는 성향에 안성맞춤이다.
남의 이름에 이토록 지대한 관심을 갖고 사는 건 역설적으로 내가 평범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원래 갖지 못한 것에 집착하는 법이니까. 빈센트 반 고흐가 생애 마지막을 보낸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로 여행을 갔을 때 그의 무덤에 적힌 이름은 내게 그저 단순한 알파벳 조합이 아니었다. 여행 내내 추상적일 뿐이었던 그의 존재감이 이름을 마주하자 비로소 실체가 되는 느낌이었다. 마찬가지로 내게 소중한 사람들의 이름은 그들이 부재할 때 대신해서 존재감을 채워 넣어준다. 마음이 요동칠 때 이름들을 떠올리면 추위에 떨다가 따뜻한 난로 앞에 앉은 사람처럼 서서히 차분해진다. 나는 이제 너무나 유명해서 고유명사에 가까운 이름들보다는 주위에 있는 평범한 이름들을 더 자주 떠올리며 지낸다. 그리고 나처럼 평범한 이름들을 함부로 잊어버리거나 잘못 부르지 않기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단어처럼 다정하게 불러 주기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