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하는 물건 하나쯤은 괜찮아요

머그컵에 관하여

by 바삭

요즘 사람들은 그 어떤 시대보다 더 많은 물건들을 소유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생존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것은 별로 없다. 사람은 립밤, 물티슈, 혹은 책상이나 TV 없이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별로 크지 않은 내 가방 안을 들여다보면 왜 그렇게 목숨처럼 들고 다니는지 문득 궁금해지는 물건들이 대부분이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물건들조차 그러한데, 나의 방에서 방 주인의 몸보다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물건들의 쓸모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쓸모없는' 물건들 중 당장에 내다 버릴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 바로 현대인의 미스터리다. 어딘지 모를 공장에서 뚝딱 만들어낸 기성품들이 내 취향과 생활패턴, 심지어 가치관과도 연결된다는 게 가끔은 어이가 없다.


사실 디자인 등을 제외한 채 쓸모만 놓고 본다면 나와 내 룸메이트, 옆집 사람, 그 옆집 사람, 그 윗집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물건의 종류는 다 비슷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밥을 먹어야 하니 밥그릇과 수저가 있을 것이고 잠을 편히 자야 하니 이불과 베개, 그밖에 옷걸이, 시계, 작은 거울, 물컵 등등. 그러나 이것들 사이의 우선순위는 나와 내 룸메이트, 옆집 사람, 그 옆집 사람, 그 윗집 사람에게 각각 천차만별이다. 두 사람이 똑같은 머그컵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컵이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까지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잘 사용하던 머그컵이 깨졌다는 구체적인 상황을 상상해 보자. 나의 직장 동료 A의 경우, 깨진 컵을 치워야 한다는 사실이 달갑지 않지만 어쨌든 탕비실로 가서 대체재(일회용 종이컵)를 꺼내 쓸 수 있을 것이다. 흐물거리는 종이의 질감은 다소 아쉬워도 일단 새 머그컵을 살 때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 나의 경우, 그건 단순히 물건 하나를 잃은 것이 아니라 아침마다 '그' 머그컵에 음료를 담아 마시는 루틴이 깨졌다는 느낌에 더 가깝다. 컵의 옆면 어디쯤의 코팅이 살짝 벗겨졌는지, 어느 정도까지 음료를 채워야 적지도 많지도 않은 양이 되는지 따위의 익숙한 경험들과 지식들도 컵이 깨지면서 함께 사라진 것이다. 따라서 동료보다는 내 일상에서 머그컵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더 컸다고 할 수 있겠다. 반대로 깨진 물건이 화분이나 연필꽂이였다면 나보다는 동료에게 더 큰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모든 컵들은 각각 다른 용도를 가지고 있다. 우유를 마실 때, 커피를 마실 때, 생수를 마실 때, 혹은 탄산음료를 마실 때 사용하는 컵이 모두 다르다. 술잔은 말할 것도 없으므로 설거지 걱정은 나중으로 미뤄두고 주종에 따라 매번 다른 컵을 꺼낸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책상에 붙어 앉아 뭔가를 해야 할 때 꼭 커피나 차, 맥주 등의 음료(술)를 옆에 두는 습관이 있다. 때로는 음료 그 자체보다 손 닿는 위치에 컵이 있다는 사실과 그걸 홀짝이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술자리에서도 사람들과 '짠'하는 것보다는 혼자 잔을 들고 홀짝홀짝 마시는 걸 선호하기 때문에 간혹 '주량을 도무지 측정할 수 없는 주당'이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술잔을 놓지 않는 이유는 '한시라도 술이 끊기는 게 싫다' 같은 주당의 기개라기보다는, 여러 사람 사이에 끼여 있을 때 생길 수밖에 없는 조그마한 어색함 같은 걸 견뎌내려 무의식 중에 내가 좋아하는 물건(컵)과 좋아하는 행위(홀짝이기)에 기대는 것에 가깝다.


킴 투이의 자전적 소설 <루>에는 이런 베트남 속담이 나온다. "머리카락이 긴 사람들만 겁날 게 많다. 머리카락이 없으면 잡아당길 사람도 없다." 욕심을 버리면 잃어버릴까 겁내는 마음도 사라진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나는 아직 미성숙한 인간이라 욕심도 사납고 두려움도 사납다. 막연하게 미니멀리즘 인테리어를 꿈꾸지만 현실은 인터넷 쇼핑몰을 뒤적거리며 나를 물건 더미로부터 구해줄 기적의 수납함을 찾아 헤매는 맥시멀리스트다. 머그컵 하나를 보고 이렇게 구구절절 글을 쓸 수 있는 까닭도 내가 모든 물건에 상당한 관심을 쏟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적인 인터뷰 단골 질문인 "무인도에 꼭 가져가고 싶은 3가지 물건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누군가를 파악할 때 그 사람이 아끼는 물건을 묻는 건 큰 도움이 된다. 몇 년 전에 애지중지했던 물건들도 지금은 다 촌스러워진 것처럼 그 대답도 시기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겠으나, 아무래도 머그컵만큼은 무인도에 꼭 들고 가야 할 것 같다. 내게 머그컵은 아무리 오래 써도 낡았다거나 질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그저 계속해서 익숙해질 뿐인 물건이다. 익숙한 머그컵을 들고 책상 앞에 앉으면 예외없이 익숙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생각해 보니 쉽게 싫증 나고 부주의하게 버려지는 수많은 물건들의 무덤 사이에서 이런 끈끈한 관계 하나쯤 갖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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