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에 관하여
아침의 직장인은 기분이 나쁘다.
매 순간 청천벽력 같은 기상 알람이 울리고 현실 세계로 멱살 잡혀 끌려올 때마다 인상을 팍 쓴 채로 인생에 대해 깊이 성찰하기 시작한다.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지금 당장 이불을 박차고 나가야 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 과연 그 일로 인해 진정한 보람을 느낄 수 있을까? 어쩌면 인생은 이불속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게 아닐까…. 물론 돈은 벌어야 하기 때문에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나면 금세 이성을 되찾고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만일 지옥이란 게 있다면, 형벌로 각자에게 가장 끔찍한 순간을 끊임없이 재연한다고 상상해본다면, 그곳에서는 영화 <인셉션>처럼 끊임없이 울려대는 알람에 끊임없이 잠에서 깨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학생 시절부터 꾸준히 아침을 싫어해왔다. 전날 밤 몇 시에 잠들었든 간에 상쾌하게 잠에서 깨려면 기본적으로 오후는 되어야 하므로 쉬는 날에는 점심식사까지 거르는 경우도 많다. 작년부터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친구는 주말이면 늦은 오후까지 방에서 (정확히는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 내가 몸이 안 좋은 건 아닌지 걱정하다가, 몇 달이 지난 시점부터는 그 패턴에 완벽히 적응하여 오늘은 저 친구가 과연 몇 시에 일어날지 은근히 두근대며 기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쯤에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고백하자면, 나는 초중고 학교생활 내내 개근상을 받았다. 심지어 대학을 다니는 4년 동안에도 (시험은 망할지언정) 수업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전날 과음을 했거나 과제 때문에 밤을 새웠어도 아침 수업에 꼬박꼬박 출석했다. 그러니까 살면서 단 하루도 아침형 인간이었던 적이 없지만 좀처럼 지각이나 결석은 하지 않는, 자본주의와 경쟁사회가 낳은 괴물이 바로 나다.
그렇게 올빼미 기질을 제법 잘 숨기고 지독한 사회생활을 이어나가던 어느 날, 여기저기서 '미라클 모닝'을 실천한다는 미라클한 인간들의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하자 문득 나의 '호러블 모닝'을 되돌아보게 된다. 아침형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했다는 죄 하나 때문에 일주일 중 5일의 아침을 좀비의 몰골로 열어젖혀야 한다는 게 생각할수록 억울했던 것이다. 지금 당장은 괜찮아도 이걸 10년 동안 반복하면 삶의 질도 현저히 떨어질 게 분명했다. 나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라도 말로만 내뱉는 '굿모닝' 말고 진짜 '굿모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잠을 줄이는 것은 '잠은 죽어서 자는 거라고 생각했다간 진짜 죽을 수도 있다'라는 내 신념과 어긋나는 행동이므로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 했고, 너무 사소해서 어디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그게 바로 빵이다.
빵은 어떤 문화권에서는 식사고 또 다른 문화권에서는 간식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특히 대한민국의 부모님들에게 빵이란 어디까지나 간식일 뿐, 절대로 식사의 영역에 들어갈 수 없다. 아버지는 내가 저녁으로 샌드위치나 피자 따위를 먹고 있으면 꼭 "그걸 먹으면 저녁을 많이 못 먹는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게 저녁이다"라고 주장하는 내 말은 못 들은 건지 안 듣는 건지, 열에 아홉은 "밥을 거르면 뼈에 바람이 든다"라는 무시무시한 경고로 대화를 끝내곤 했다. 그래서인지 독립을 한 지금도 빵을 먹고 있으면 비쩍 마른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걱정 어린 눈빛이 느껴지는 것만 같고, 가끔은 내 몸에 제대로 된 영양소를 공급하지 않는 것 같은 죄책감마저 들 때가 있다.
그런 강경 쌀밥파 부모님도 어느 정도 메뉴 선택에 너그러워지는 시간이 바로 아침이었다. 앞으로 먹을 끼니가 두 번이나 남아있어서 비교적 안심이 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침을 잘 챙겨 먹지 않는 자식이 뭐라도 입에 넣고 있다는 게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원래부터 한식과 양식 가릴 것 없이 좋아했던 나는 주말에 여유롭게 일어나 한 시간 정도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빵과 커피를 즐기는 걸 일종의 취미이자 치유의 시간으로 삼기 시작했던 것이다. 평일 아침에 기분 좋은 상태로 일어날 수 있는 해결책으로 빵을 떠올린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출근이 아닌 맛있는 빵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조금 더 쉽게 이불을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유난히 지치는 퇴근길에는 안 가본 빵집에 들러 다음날 아침에 먹을 빵을 산다. 아주 피곤한 날이 아니라면 한 시간 정도 일찍 일어나 빵에 커피를 곁들이며 책을 읽고, 가끔은 글을 쓰기도 하고, 그냥 멍 때리며 가만히 앉아 있기도 하다가 출근 준비를 시작한다. 미라클한 아침형 인간들처럼 운동이나 영어공부를 하는 건 아니지만 지각의 마지노선보다 오 분이라도 일찍 일어나는 행위 자체가 나에겐 충분히 미라클한 일이다. 그리고 그걸 지속할 수 있게 하는 힘은 한 시간 짜리의 소소한 행복이다. 나도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혼자만의 온전한 시간을 가진 뒤에 하루를 시작하면 조금 덜 피곤하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지금도 휴일 전날에는 새벽까지 노느라 늦게 자는 일도 많고 다음날 어김없이 해가 중천에 뜬 뒤에야 일어나므로 <나는 이렇게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같은 자기계발서스러운 결말은 아니지만, 피곤을 떨쳐 내기에 급급했던 평일 아침이 딱히 싫지만은 않아졌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빵으로 일구어낸 놀라운 성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