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고 나갈 옷이 없다. 그런데 옷장에는 더 이상 옷을 보관할 자리가 없어 새로운 옷을 살 수도 없다. 거짓말 같은 상황에서 침착하게 과거를 되짚어보니, 옷을 산 기억만 선명하고 버린 기억은 없다. 월급은 다 누가 훔쳐가는 줄 알았더니 그 도둑이 바로 나였던 것 같다.
옷장은 이렇게나 풍족한데 나는 왜 매일 누추한 모습으로 집을 나섰던 걸까? 최근의 깨달음 중 하나는 “이 정도면 무난하게 매일 입을 수 있겠어”라는 생각으로 구매한 옷들은 정작 매일 입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 무난한 옷들은 딱 중간 정도로만 마음에 드는데, 막상 외출을 할 때는 중간 정도가 아니라 최고로 마음에 드는 옷에만 손이 간다. 단지 무난할 뿐 객관적인 옷의 상태는 매우 멀쩡한데도 불구하고 막상 그걸 입으면 뭔가 좀 부족한 기분이 든다. 나는 스스로와의 심리전에서 패배하고 만 것이다.
50퍼센트 정도 마음에 드는 옷을 세 벌 사느니 100퍼센트 마음에 드는 옷 한 벌을 사는 쇼핑 패턴은 이미 여러 매체에서 소개된 당연하고도 쉬운 패션 노하우다. 지나치게 유행을 타거나 한 철 입고 버려야 하는 조악한 품질의 옷 말고, 질 좋은 옷을 사서 오래오래 입은 뒤 운이 좋다면 누군가에게 물려주는 것. 그러나 패션에 조예가 깊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게 어떤 옷이 질이 좋고 활용도도 높은지 한눈에 알아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빛나는 센스를 타고난 게 아닌 이상, '질 좋은 옷을 일 년에 한 번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한 번 세탁하면 순식간에 누추해지는 옷들만 주야장천 구매하는 암흑의 시기'를 거쳐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비록 패션 암흑기 시절 구매한 옷들은 잠옷으로 입는다며 한 벌도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심지어 잠옷으로도 입은 적이 없지만, 언젠가는 바닥 닦는 걸레로라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아무래도 미니멀 라이프는 다음 생에서나 가능할 것 같다.
누군가 맡은 일을 잘 소화했을 때 칭찬의 의미로 ‘딱 맞는 옷을 입은 듯하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런데 나는 살면서 딱 맞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별로 없다. 항상 100퍼센트가 아니라 50퍼센트만 마음에 드는 내 옷장 같은 기분으로 산다. 안 맞는 옷을 입는 바람에 하루 종일 그쪽으로만 신경이 쏠리는 불편한 기분으로, 혹시나 능력 밖의 일을 맡은 것은 아닌지 고민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그런 순간들을 생각하면 잠옷으로도 입지 못해 구석에 처박힌 옷들처럼 씁쓸하다. 하지만 누군가 그랬던가, 패션은 자신감이라고. 머릿속에선 고민이 자연재해 수준으로 넘실대지만 일단 어깨를 쭉 펴고 옳은 길로 가고 있다고 한 번 더 우겨본다. 그러면서 주변 사람의 의견도 안 듣는 척 들어보고, 딱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사람을 은밀하게 따라 해 보기도 하고, 이것저것 섣불리 시도했다가 실패해보기도 하며 점점 안목을 기르는 것이다. 사람이 맨날 실패만 하란 법은 없으니, 언젠가는 찰떡같이 어울리는 옷을 입은 듯이 편안하고 여유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