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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 Jan 20. 2022

헛소리 금지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카페인 빼고 주세요"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 같은데 정작 말조심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나 역시 생각 없이 내뱉는 바람에 이미 내 통제를 떠나버린 말들이 아찔할 정도로 많다. 아직 그리 긴 세월을 살지 못했는데도 그렇다. 아직까지는 내가 저지른 말실수가 눈에 띄게 나쁜 결과를 몰고 온 일은 없었으나 그건 그냥 운이 좋아서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나치게 경솔한 성격이라거나 혹은 사회적 영향력이 막강해서 말 한마디의 무게가 상당한 인물이 아닌 이상,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실수의 범위란 대개 은은하고 사소하기 그지없다. 크고 작은 갈등을 초래하고 평판을 깎아먹긴 하겠으나 당장에 아침드라마 예고편 같은 비극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악의가 가득 담긴 말들과 책임감 없는 선택들이 수년간 누적되면 반드시 인생을 망치게 된다. 막대한 부를 가졌더라도 그저 실패한 인생일 뿐이다. 심지어 칼 같은 말로 남을 상처 주었다면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돌려받게 되어 있다고 믿는다. 엄마는 항상 내게 "남의 눈에 눈물 흐르게 하면 내 눈에는 반드시 피눈물이 흐른다"라고 말씀하셨다. 남을 상처 주고자 할 때는 피눈물 흘릴 각오 정도는 해야 한다는 거다. 언젠가 판단력이 흐려지고 주변 이들이 내 맘을 몰라주는 것 같다고 느끼는 때가 온다면 그들을 탓하기 전에 꼭 먼저 스스로의 언행을 돌아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몸과 마음이 지쳐 객관성을 잃은 상태에서 남 탓만 하고 있으면 회복이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느낀 바로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웬만하면 당사자의 면전에서 대놓고 잘못을 지적해주지 않는다. 신중한 언행은 사회에 발을 들이기 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할 품성으로 간주되어 그의 부족에 따른 불이익은 본인이 깨닫고 고쳐나가야 할 문제일 뿐이라고 여겨지는 것 같다. 그렇기에 나의 실수들을 거리낌 없이 지적해주는 친구들과 가족들이 더욱 소중하고 고마운 것이다. 이만하면 충분히 예의를 갖추었다는 생각, 혹은 사회생활 경력이 오래되어 더 이상 예의를 갖추는 것이 귀찮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지치지 말고 감수성을 예민하게 갈고닦아야 한다. 그래야만 상대의 얼굴에서 불편함 내지는 불쾌함의 힌트들을 정확히 감지해낼 수 있고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사람들이 떠나가는 불상사를 막을 수가 있다. 부정적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남에게 퍼부어 버리거나 못할 말을 쉽게 내뱉는 사람은 아주 우스워지기 십상인데, 다른 건 몰라도 한 번 우스워진 사람은 쉽게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요즘 들어서는 함부로 사람에 대해 정의 내리는 일도 만만찮게 경솔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타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나의 개인적인 견해가 반드시 포함되기 마련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언어는 절대로 객관적일 수 없다. 편견 가득하고 불완전한 시선을 거쳐 제삼자에게 전달된 타인은 순식간에 납작해져 버리고 만다. 좋은 사람인 줄 알았던 이가 알고 보니 실망스러웠던 경우도 있고 흔치는 않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데, 이미 과거에 특정한 이미지로 각인되어버린 그들에게는 해명의 기회도 없다. "사실은 지내다 보니 처음 생각이랑 좀 다른 사람이더라"라는 식의 첨언도 참 애매하게 신뢰가 떨어지는 일이다.


<문심조룡>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언어란 날개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아주 쉽게 멀리까지 전해질 수 있고, 감정은 뿌리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어렵지 않게 맺힌다. 그렇다면 문자를 사용하여 그것들을 전달하고자 할 때 어찌 신중을 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 역시 글의 힘을 맹신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거의 나 자신에 대해서만 글을 쓴다. 너무도 사소하고 재미없고 도대체 어느 고마운 사람이 시간을 내어 읽어줄까 싶긴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최선이다. 나에 대해 쓴 글을 몇 년 뒤 되돌아본다면 물론 부끄럽겠지만 정신적 대미지를 혼자서만 감당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간의 감정과 생각에 휩쓸려 남에 대해 함부로 쓴 글이 내 손을 떠나 의도치 않은 형태로 변형되고 누군가에게라도 상처를 입힌다면, 그건 정말 감당하기 힘들 것 같다.


내가 남들의 의도치 않은 말에 어처구니없이 상처를 입듯, 나도 분명 누군가에게는 깊거나 얕은 상처를 수도 없이 주며 살아왔을 것이다. 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세상 다시는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모두와 잘 지낼 수는 없는 법이라고 책임을 회피하는 것보다는 실수를 줄이려 노력이라도 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할 말 다 하며 사는 멋쟁이라고 착각하는 무뢰한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번 명심하자. 한 번 내뱉은 말과 일단 내 손을 떠난 글은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새 해에는 술 마시고 헛소리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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