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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 Jan 29. 2022

두 번만 고민하고 그만두는 용기

2021년이 되기 일주일 전, 서점에서 동양 고전 속 문장들이 담긴 일력을 샀다. 매일 좋은 글귀 하나씩을 읽은 뒤 날짜를 뜯어내는 퍼포먼스로 하루를 잘 마무리해보고 싶어서였다. 꼭 쓸데없는 데서 성실한 나는 결국 낙오 없이 365장의 일력을 모두 뜯는 데 성공했다. 그중 인상 깊거나 실천하고 싶은 글귀를 읽은 날은 뜯은 종이를 버리지 않고 책상 앞에 붙여 두거나 휴대폰 메모장에 기록하기도 했다. 2022년의 첫 해가 뜬 후 새해맞이 대청소를 하며 뼈대만 남아 앙상해진 일력을 쓰레기통에 넣고는 꽤나 뿌듯해했던 기억이 난다. 이만하면 일력을 산 사람 중에서도 잘 활용한 축에 속할 것이다.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빨리 그만두어야지 어째서 내년까지 기다리겠는가?”


얼마 전 지난 일 년간의 메모를 생각 없이 훑어보다가 위와 같은 문장을 발견했다. 메모를 한 과거의 나는 그것이 맹자의 말이라는 것까지 친절히 덧붙여 두었다. 그걸 보고는 문득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는데, 그렇게 열심히 읽고 뜯고 메모해 놓고는 해가 바뀔 때까지 전혀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어떻게든 끝이 날 게 분명한 지지부진한 관계들을 먼저 끊어내지 못하는 것이 내 고질병이다. 한계에 다다르기 직전까지는 일단 버티고 본다. 짐작하건대 과거의 나도 그런 물렁함을 한 번 고쳐보고자 공들여 기록까지 했을 것이 분명했다. 꽤나 열심히 살았던 그 친구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올 해도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변명하자면 ‘내년’이 이렇게나 빨리 ‘올해’가 될지 몰랐다. 넋 놓고 있다가 뒤통수 맞듯 새 해를 맞이하는 것은 매년 겪는 일이긴 하나 바쁘다는 핑계로 제법 많은 일들을 못 본 척하며 살고 있다는 걸 메모를 보며 새삼스럽게 깨달아 버렸다.


물론 해가 바뀌어도 그대로인 내 단점들만큼 새로 생긴 장점들도 많다. 지난 일 년간 규칙적인 운동 습관과 건강한 식사 습관을 만들었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꾸준히 글을 썼으며 심지어 운전면허까지 취득했다. 그런데 좋은 습관을 아무리 더하고 더해도 제자리인 것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들었던 이유는 정작 가장 큰 마이너스 요소들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직장에서는 여전히 스트레스를 받고 이대로 괜찮은가 싶은 관계들에 대한 고민은 이미 일상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뭔가를 인생에 계속 더해야 할 것 같아 안달이 나 있었으나 일단 많은 것을 버려야 더 많은 것을 채울 수 있는 법이라는 진리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나 뭘 언제 얼마나 버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진짜 자유로운 사람이란 제때 잘 버리고 잘 그만두는 법을 아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닐까. 내게는 너무 어려운 숙제다.


올 해는 일력을 사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일력에는 지나치게 숫자가 많은 것 같다. 수많은 ‘내일’들이 앞으로 무한히 많이 펼쳐진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고 일단 잠이나 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작년에는 두 번 고민하지 않고 시작하는 용기를 연습했다면 올 해는 두 번만 고민하고 그만두는 용기도 연습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조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적절한 속도와 적절한 지점에서 그만두거나 시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고여서 썩어버리지도 않고 너무 빠르게 흐르는 바람에 모든 걸 망쳐버리지도 않는 잔잔한 강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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