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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 Feb 03. 2022

지금의 냄새

인생의 각 시기마다 떠오르는 냄새가 있다. 예를 들어 입시 미술을 준비하던 중고등학생 시절을 생각하면 4B연필과 물감 특유의 어딘가 먹먹한 냄새, 화실에 쌓여 있는 각종 잡동사니의 퀴퀴한 냄새, 그리고 독서실과 교실 책상의 나무 냄새가 떠오른다. 대학생 때는 온몸에서 술냄새가 났을지도 모른다. "났을지도 모른다"라며 자신 없게 서술하는 이유는 술냄새야말로 본인보다 남들이 더 잘 알아맞히는 대표적인 냄새이기 때문이다. 일단 나로서는 딱히 술냄새를 풍기고 다니지는 않았다고 주장하고 싶다. 취업 준비생 시절에는 온몸에서 커피 향이 났다. 눈을 뜨면 동네 카페에서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자기소개서를 찍어냈기 때문에 카페에 진동하는 원두 향이 옷과 가방, 머리카락에 온통 스며들었다. (그리고는 장기에도 스며들어 역류성 식도염과 위장병을 안겨 주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냄새를 기억한다는 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언젠가 질병이나 사고로 후각을 잃은 사람이 고향에 다시 방문했을 때 이전과 같은 친밀함과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집 냄새", "엄마 냄새" 같은 것은 어떤 냄새라고 단호히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정확한 표현이 된다. 냄새는 녹음할 수도 없고 사진을 찍을 수도 없으므로 다른 어떤 것으로도 속일 수 없는 순수한 형태의 기억이다.


후각이 예민한 것 치고 향수에는 큰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예민하기 때문에 오히려 바디 로션이나 핸드크림 정도의 향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향수를 뿌리면 한 가지의 강렬한 냄새가 하루 종일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느낌이 들어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직장 생활을 하는 지금은 거의 매일 아침 향수를 뿌리고 나간다. 많은 양을 뿌리는 건 아니라서 거의 나한테만 느껴지긴 하겠지만, 같은 향수를 3통째 사용하고 있으므로 이제는 외출 전 향수 뿌리는 일이 양말을 신는 것만큼이나 무의식적인 루틴에 가깝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추가된 일종의 방어막인 것 같기도 하다. 체향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한 사람의 첫인상을 결정하기도 하며 때로는 그 공간에서 어느 정도의 존재감을 차지하고 있다는 안정감과 확신을 준다. 나만 빼고 모든 게 커 보이는 세상 속에서 나도 서둘러 일 인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좀 웃긴 말이지만 '어엿한 향수 취향이 있는 어른'으로서 말이다.


독립한 후 혼자만의 공간에서 일상을 꾸려 나가는 지금은 향수 외에도 석고 방향제, 캔들, 탈취제 등 향기로운 물품들을 많이도 들였다. 향수 뿌리는 일이 외출을 위해서라면 방향제는 순전히 내 정신의 건강을 위해서다. 가뜩이나 볕도 잘 들지 않는 집에 꿉꿉한 냄새까지 나면 마음까지 순식간에 구깃해져 버린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몸을 씻는 노력만큼 집도 청결하게 유지하려 노력하고, 좋은 향이 나는 차를 마시고, 조금 비싸더라도 이왕이면 향이 좋은 섬유유연제를 쓴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 이 시기도 연필 냄새 가득한 학창 시절이나 술냄새 가득한 대학시절만큼이나 향기롭고 생생하게 기억되기를 바란다. 당장은 그저 주말만 기다리며 출퇴근을 반복하는 무색무취의 삶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훗날 돌이켜 보면 어쨌든 기억에 남는 산뜻한 향 하나 정도는 있을 것이다.


음식 냄새와 차가운 눈 냄새가 섞여 있던 어느 밤의 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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