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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 Jun 23. 2021

산책의 미학

근력 운동 못지않게 산책에도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온몸의 관절을 반복적으로 움직이며 사이사이 볕의 따스함이 스며들게 하고, 동시에 생각의 서랍장까지 부지런히 열고 닫아야 하므로. 어떤 생각을 뇌 한구석에 너무 오래 처박아 두는 행동은 이롭지 않다. 곰팡이가 슬어 원래의 형상을 도무지 알아볼 수 없게 되거나 주변의 다른 멀쩡했던 생각들까지 망쳐 버리기 일쑤다. 제 속 파먹으며 살지 않으려면 억지로라도 세상 밖으로 꺼내 뽀송뽀송 말려 주어야 한다. 산책은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는 훌륭하고도 어려운 취미다.


매일 햇빛을 보며 산책하는 일이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내가 읽은 여러 책의 저자도, 닮고 싶은 어른도 같은 조언을 건넨다. 확실히 요즘은 햇빛 보며 걷는 일이 늘었다. 그러나 햇빛을 보면 더 피곤해진다고 생각했던 학창 시절의 나는 종이처럼 약했다. 몸도 그다지 건강하지 못했지만 마음이 더 병약해서 환기가 전혀 안 된 상태의 생각 속에만 파묻혀 있곤 했다. 바깥에 나가면 피부가 그을리는 게 싫었고 땀을 흘려 앞머리가 부스스해지는 것도 싫었다. 야외란 목적지를 향해 실내에서 실내로 옮겨 가기 위한 불가피한 여정이었을 적이 많았다. 그래서 오래된 지인들은 내가 요즘 스마트워치로 하루의 총활동량을 계산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이한 걸 보았다는 눈빛을 한다. 


야외 활동이 좋아지기 시작한 드라마틱한 계기는 딱히 없는 것 같다. 다만 조금씩 더 먼 곳까지 시선을 둘 줄 알게 되면서, 사람 사는 방식이 너무도 다양한 나머지 셀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달았을 뿐이다. 알고 보니 그을린 얼굴이나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신경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재미있는 일들이 세상엔 훨씬 많았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 때문에 그 많은 재미를 놓치고 살 순 없었다.  방구석에서 나를 옥죄었던 심각하고 우울한 생각들도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는 허무할 정도로 작아 보였다. 이제는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가쁜 숨, 깨끗해지는 머릿속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구겨져 있던 마음을 탁탁 털어 널어놓는 상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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