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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두 단어 17화

유령과 침묵

유달리 말이 많은 날이다.

by 바질

공포 영화를 보면 흔히 나오는 장면이 있다. 사람이 유령을 보면, 유령도 사람을 본다. 유령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에게 달라붙는다. 집착을 하고 소리를 지른다. 나 여기 있어, 나 여기 있어, 하면서.


유령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들러붙는다. 유령에게는 보이지 않는 자신을 하나의 존재로서 인식하는 사람만이 의미가 있다고 여긴다. 볼 수 있고, 대화를 할 수 있고, 닿을 수 있어야 유령은 존재를 얻게 되고 상대방에게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된다.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중요한가. 어떤 영화를 보면 무언가가 되고자 유령이 사람의 육체를 탐낸다. 육체를 얻으면 그들을 보는 사람이 없더라도 하나의 존재가 되고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육체를 통해 부여된 정체성이 유령의 존재를 긍정하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사람은 육체를 볼 수 있으나 그 안의 유령과 혼은 볼 수 없다. 당신은 코가 이렇게 생겼군요, 눈은 어떻군요, 머리카락은 짧고 키는 이 정도군요,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드디어 오랫동안 갈망하던 육체 안에 있소', '나는 타인이라는 존재를 정복하고 한 세상을 얻었소', 하며 기뻐하는 유령의 실체는 보지 못할 것이다.


육체 속에 숨겨진 것은 오로지 유령만의 것이다. 그래서 타인과 공유될 수 없다. 존재는 오로지 육체에게만 있고 영혼에게는 없다. 몸 껍데기에 눈이 가려진 사람들로 인해 언젠가는 유령은 한계를 깨달을 것이다. 내가 또 보이지 않는구나.


그러니 자신에 대해 말하게 된다. 그러나 말 또한 몸으로부터 태어난 것인지라 온전한 전달이 되지 못하고, 때때로 하려는 말과는 정반대의 전달이 이루어진다. 두 번째 한계는 침묵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부정의 침묵일까, 긍정의 침묵일까.


부정의 침묵이라면 온전히 나라는 존재를 타인에게 이해시키지 못하는 것에 대한 좌절감이고, 긍정의 침묵이라면 전달이 불가능한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온전한 나를 온전히 혼자서만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저주일까, 축복일까.


부끄러움이 많은 나는 축복이라 생각한다.


문득 생각하기를, 글이란 것이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수단일 것이지만,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피하고 싶은지' 적는 것은 생년월일, 나이, 이름을 말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할 것이다. 나를 나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육체가 있는 지금 나는 유령일 때 느낄 수 없던 것에 대해 적는다. 끈적하고 불쾌한 땀과 오줌, 눈물과 피, 딱딱한 뼈, 관절, 마디에 대해 적는다. 보는 것, 듣는 것, 먹는 것에 대해 적는다. 피부와 닿는 감각들이 나를 말해준다 믿으면서.


오늘은 일 끝나고 집으로 가면서 아래 문장을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겨울 추위가 찾아왔고, 온도가 내려간 주변은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그게 무엇일까 생각하며 걸었다.


겨울이다.

하늘은 높아 보이고 별들은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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