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계적으로 빠르게 봉제를 배우려거든 문화센터든 공방이든 가서 수업을 들으라고 하는 것은 괜한 조언이 아니었다.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커리큘럼을 짜자니 늘 많은 사전 조사를 해야 했고, 방법을 확실히 익히기 위해 긴 시간을 들여야 했다.
독학을 선택한 데에는 가까운 곳에서 바로 시작하는 수업을 발견하지 못한 탓도 있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은 탓도 있지만,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나는 보청기 없이는 대화를 할 수 없는 난청인이다. 보청기를 착용할 수 없거나 소음이 많은 환경에서 수업을 따라가는 데에 커다란 어려움이 있다. 자유형으로 30미터 레인을 겨우 한두 번 왕복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실력을 더 키우고 싶었지만 수영장 내에서의 의사소통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강습을 받는 것을 포기했다. 스킨스쿠버를 배우고 싶었지만 시작할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울림이 심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수업들은 따라갈 수 없거나, 눈치로 겨우 따라간다 해도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요가는 체육관에서 강습을 받다가 나중에는 작은 공간에서 소규모로 하는 곳들을 찾아다녔고, 매우 좋아했던 필라테스는 강사의 설명을 절반은 놓치는 것 같아 아쉬웠다.
분명히 재봉틀 소음이 적지 않을 환경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다. 당시에는 단 하나뿐이었던 온라인 강좌는 한참 후에야 발견했고, 초급 커리큘럼을 보니 이미 내가 해 본 것들이어서, 오히려 독학에 대한 자신감이 강화되었다.
2017년 9월부터 이듬해 1월 말까지 틈 나는 대로 가위집, 파우치, 무릎덮개, 앞치마, 필통, 티코스터, 트레이, 무릎담요, 다림질 패드, 티슈 커버, 다리미 커버, 가방 들을 만들었다. 직선 박기와 두 번 접어 박기 같은 기본기부터 시작해서 지퍼 달기, 곡선 박기, 바이어스 테이프로 바인딩하기, 말아박기, 안감 넣기 같이 조금 더 숙련이 필요한 기술들을 차근차근 익혀나갔다.
얼마 되지 않아 비교적 단순한 재봉틀인 치코로는 멀리 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코는 깜찍한 외모에 비해 야무지고 튼튼했지만 두 장이 밀리지 않도록 섬세하게 재봉하기가 어려웠고, 조금만 겹이 두터워지면 어김없이 땀이 뜨거나 바늘이 부러졌다. 저가형 재봉틀의 한계였다. 힘이 더 좋으면서 속도 조절 레버와 자동 사절 장치(자동으로 실을 끊어주는 장치), 그리고 무릎 레버(손 안 대고 노루발을 들어 올리는 장치)가 있는 고가형 가정용 재봉틀이 탐났다. 실력을 키우기 위해 기계 교체는 필수라는 판단을 내리고서,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조사를 했다. 눈에 들어오는 제품들은 모두 200만 원 이상이었다. 세일, 공동 구매, 중고 거래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지 2주도 채 못 된 어느 흐린 아침, 나는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이른 아침의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채비를 했다. 서울 서부 지역에 거주하는 까닭에 자주 다니던 코스인 내부순환로와 성산대교를 타고 서부간선도로로 진출해 서해안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참으로 오랜만의 서천 행이었다. 여름이면 연둣빛이 멀리까지 이어지는 마산, 기산, 한산의 너른 논들, 갈대밭이 넘실대는 금강 하구의 신성리, 길게 펼쳐진 모래사장이 있는 비인과 춘장대, 규모 있는 항구의 모든 매력을 발산하는 홍원항, 그리고 한산면 일대의 달고 향긋한 소곡주와 지금은 옛 자산으로 남았지만 여전히 등대 같은 빛을 어슴푸레 던져주는 세모시.
서천군은 한산소곡주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자주 방문했던 지역이었다. 서천읍에 자리 잡은 한 공방에서 박스만 뜯은 새 디지털 재봉틀을 반값에 내놓는다는 정보를 중고나라에서 접하고 거의 망설임 없이 결정했던 터였다. 서울과 충남 사이의 거리는 내가 직거래를 결정하는 데에 별로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곳은 다름 아닌 서천이었으니까.
예전에는 주로 동서천까지 고속도로를 달린 다음 29번 국도로 접어들어 공주, 부여 방면으로 방향을 틀어 한산면으로 들어갔지만, 그날은 그보다 훨씬 전에 서천읍 쪽으로 빠졌다. 서천IC삼거리를 지나자 곧 구암리 마을회관이 나타났다. 지도상으로는 읍내에서 멀지 않았지만 아파트와 상가가 있는 읍내와는 사뭇 다른 시골 풍경이었다. 예전에 인터뷰를 위해 전국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던 무렵에 자주 그랬던 것처럼 내비게이터는 안내를 해주다가 말았고, 목적지는 분명 고작 백 미터 남짓한 거리인데 어느 길인지 가늠할 수 없었던 나는 주변을 조금 살펴보다가 전화를 걸었다.
수도권의 상습적인 도로 정체를 고려해 아침 일찍 출발했음에도 다 와서 헤맨 까닭에 약속 시간이 15분쯤 지나고 있었다. 전화를 받은 젊은 여자분은 내가 있었던 장소에서 바로 보이는 길에 나타나 손짓을 했다. 병원 예약이 되어 있어 시간이 별로 없다고 했다.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일은 미리 사전 점검을 해도 나를 자주 미안한 상황에 처하게 했는데 그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야 하고 본인도 전날부터 몸살기가 있다면서, 그분은 나를 2층으로 안내했다. 긴 일자형 건물로 들어가자 살림집으로 보이는 1층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2층으로 통하는 목재 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올라가자 널찍한 공간에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벽에 마주대어 설치된 작업대에는 엘나 재봉틀 몇 대가 놓여 있었다. 그분은 약간 서두르면서도 박스를 열어 재봉틀과 부속품들을 빠짐없이 확인시켜 주었고, 내가 초보자임을 알고서 노루발과 액세서리들의 쓰임새를 설명해 주었다. 엘나 엑셀런스 680은 개봉만 했을 뿐 깨끗한 상태로 박스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취미로 재봉을 시작했다가 엘나 본사에서 지원을 받아 공방을 열었다고 했다. 집 옆에 원단 창고를 짓고 다른 일을 하던 남편을 끌어들여 온라인 원단 판매업을 시작했다면서 구경하고 가시라고 권했다. 함께 구입하기로 한 사절 기능이 있는 페달을 보여주려고 박스를 열기 위해 커터를 찾는데 눈에 띄지 않자 옆에 놓여 있었던 재단용 로터리 커터를 집어 들었다.
“이걸로 막 다른 거 자르고 그러믄 안 되는데 맨날 이러네요.”
희미한 웃음을 띠고 그녀가 말했다. 재단용 가위로 천 이외의 것을 잘라서는 안 된다는 주의사항을 곧이곧대로 지키고 있었던 순진한 초보는 통 큰 프로가 다용도로 사용하는 원형 재단 칼이 두터운 골판지 상자를 가르는 것을 보면서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송금해 드린 1백5만 원을 확인하고서, 그분은 뒷일을 남편에게 맡기고 아이를 데리고 출발했다. 아직 점심시간까지 1시간 이상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서, 나는 원단 창고를 구경하기로 했다.
“임시로 지어놓고서 시간이 없어서 줄곧 써왔는데 이젠 정말루 새로 지어야 해요. 지난번에 비가 들이쳐서 원단들이 엉망이 됐구먼유.”
여자분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남자분의 말씨에는 충청도 억양이 살짝 배어 있었다. 가건물 같은 널찍한 부속 건물에 들어가자 봉에 둘둘 말린 원단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수해를 입은 쪽을 대충 치워놓기는 했지만 이 많은 것들을 어떻게 정리하려나 싶었다. 눈에 확 들어온 하늘색 바탕의 도트 무늬 스판 리넨을 골라 3마 분량을 현금으로 계산하고 나오는데, 입구 벽에 못을 치고 오종종 걸어 놓은 노란 투명 플라스틱 재단용 자들과 부자재들이 눈에 띄었다. 원단과 함께 온라인 판매를 하기도 하겠지만, 서울의 동대문시장, 부산의 진시장, 대구의 서문시장 같은 큰 매장이 없는 이 지역의 수강생들은 이곳에서 부자재를 구입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운전대를 잡고서 취미로 시작한 일이 생업이 된, 내가 아는 다른 사례들을 떠올렸다. 전년도까지 3년 동안 전주에 살았을 때 자주 갔던 꽃집 주인의 경우도 그랬다. 하나둘씩 화분을 늘리다 보니 어느새 가게 자리를 보러 다니고 있더라면서, 내게는 그러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소규모 자영업자의 녹록지 않은 삶을 눈앞에서 엿본 셈이다. 바느질을 시작한 지 몇 달이 채 되지 않았지만 나도 곧 그런 고민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고민은 닥쳐서 하기로 하고, 춘장대로 빠져 잠시 모래사장을 거닐기로 했다.
흐릿한 아침나절의 차가운 공기에 노출됐던 탓인지, 서천에 다니던 시절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아침 일곱 시가 못 되어 읍내에서 출발해 기산면을 가로질러 한산면 동지리에 있다는 소규모 소곡주 제조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길산천, 화산천, 광암천, 단상천 같은 금강 지류들을 작은 다리로 건너기도 하고 나란히 달리기도 하면서 그날따라 자욱한 안갯속을 헤치고 나아갔다. 금강 하구가 가까운 이곳의 안개는 고작 1미터의 시야도 확보할 수 없을 정도로 짙고 두터웠다. 다른 때 같으면 30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를 무한히 긴 시간 동안 간신히 전진하고 있자니 비포장도로도 아닌데 푹푹 빠지는 스펀지 위를 허우적거리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아주 잘 아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아기 때부터 열 살 남짓한 나이가 될 때까지 반복된 꿈속에서 나는 한없이 펼쳐진 산과 강과 들을 건너 어디론가 끝없이 가고 있었는데, 그 모든 거대한 지형들은 희고 푹신한 이불로 되어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발이 빠져서 걸을 수 없었다. 절망감과 두려움이 엄습해 엉엉 울면서, 혹은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곤 했다. 어린 시절 고열에 시달릴 때 자주 꿨던 꿈이다. 모든 것을 흡수할 듯 푹시근한, 솜과 천으로 이루어진 대지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나에게 공포와 절망의 이미지로 남아있었다. 운전을 배운 후 처음으로 고속도로를 달렸던 날, 이대로 전국 어디든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순간 이후, 팽팽한 타이어가 시속 120km의 속도로 구를 수 있도록 받쳐 주는 단단한 도로 표면의 이미지는 나에게 그 정 반대의 감각으로, 안정감, 속도감, 자유로움의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서서히 추위가 풀리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1월이었다. 감히 신발을 벗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발이 푹푹 빠지는 춘장대 해변의 모래 위를 걸으면서, 내 안의 무엇인가가 풀리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나를 잡아 끄는 푹신한 땅을 두려움 없이 디딜 수 있을 것 같다는, 허우적거리더라도 서슴없이 다시 일어나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