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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용호 Aug 03. 2021

삶의 모순(No142)

내 유년은 행복했다. 그 행복했던 기억 속에 고통이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시골 생활은 자연이 놀이터였다. 시냇가에서 놀다 보면 여러 가지 동물들을 만난다. 모래 속에 숨어 있는 개미귀신이나 풀밭에서 찾아낸 어린 새나 작은 곤충들, 새 둥지에서 꺼낸 알이 장난감이었다. 생명은 단지 움직이는 놀잇감일 뿐이었다. 그들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뭇 생명을 해치는 가해자였고, 잔인한 고문을 일삼는 독재자였다.     

아이는 백지다. 그곳에 쓰이는 대로 평생을 살게 된다. 그렇게 옳고 그름이 정해지면 그 기준대로 살게 되는데,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왜곡된 가치 기준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그 여백에 무엇을 써 줄 것인가는 어른들의 몫이다.     

그래서 인생은 모순투성이다. 옳고 그름 따위는 문화로 형성되고 나면 모호해진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북한의 주민들은 김씨 가문을 신처럼 떠받들고 산다. 이슬람의 여인들은 검은 히잡을 쓰고 평생을 살아간다. 어느 부족은 목에 청동을 칭칭 감고 산다. 이들에게는 그것이 문화이기 때문에 당연하다. 그러나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면 이상하기 그지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도 그렇다. 우리가 당연시하는 것들이 실은 모순덩어리임을 알게 될 때가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류의 모순 한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음식습관이 그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생명이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을 먹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생명의 고통은 생각하지 않는다.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사랑하면서도 가축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주고 있다. 음식을 얻기 위해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사육한다. 식탁의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잔인하기 그지없다. 극도의 잔인함과 극도의 고통을 먹으며 즐거워하고 있는 꼴이다. 그런 일을 우리가 직접 겪는다면 지옥일 것이다. 그렇게 다른 존재에게 지옥을 주면서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물론 식물도 생명이다. 그러나 동물이 겪는 고통에 비하면 크지 않다. 나뭇가지 하나를 자르면 다른 가지가 자라지만, 닭의 다리를 자르면 죽을 만큼 아플 것이다. 그 고통의 에너지는 지옥의 분위기를 만든다. 우리가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인지 모른다.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연못에 빠지지 않은 연꽃은 주변이 어떤지 보인다. 그러나 물고기는 연못 속에서 그냥 살아간다. 더러운지 깨끗한지 모른다.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아도 왜 그런지 모른다. 원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인 줄 안다.(20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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