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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일리 Jul 16. 2020

부산'에서' 읽은 책


<역마살 독서단>*이라는 유튜브 영상을 흥미롭게 시청한 적이 있다. ‘연산동 고분군’에 가서 임소라 작가의 <대형 무덤>을 읽거나, ‘금강식물원’에 머물며 마스다 미리의 <주말엔 숲으로>에 대해 수다 떨거나 하는 식이다. 한 권의 책이 어떤 장소에 입체적으로 포개어진다. 15분 남짓 영상을 보고 나면, 그 장소에 가보고 싶어 진다. 그 책을 읽고 싶어 진다. 그 책과 그 장소는 하나가 되고, 결코 잊을 수 없게 된다.


이 영상을 보면서, “어디서 읽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려 보게 됐다. 책을 읽을 장소를 섬세하고 수고롭게 골라보는 건 어떨까, 우연과 관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택적으로. 더 나아가 한 권의 책과 장소가 포개어져 만들어내는 그 입체적인 경험을 글로 풀어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나에게는 어떤 ‘책 ×장소’가 있었던가.
가령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은 내가 유년기를 보낸 대티고개를 떠올리게 한다. ‘병약한 책벌레’였던 어린 서경식의 모습에 내 어릴 적 모습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누추하고 숨 막히는 동네 풍경을 피해 들어간 곳이 책 속이었고, 서경식과 마찬가지로 나는 ‘문화’를 동경했었다.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를 떠올리면 나는 곧바로 다대포를 떠올리게 된다. 유년 시절 아빠를 따라 낚시를 갔다가 읽었던 책. 직사광선, 그날 먹었던 땅콩크림빵, 테트라포트 아래 우글거리던 갯강구 같은 것들이 잊을 수 없는 감각적인 기억으로 그 책과 함께한다.


그 기억들을 다시 리플레이(re-play)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달과 6펜스>를 들고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다대포 역을 향했다가 그 책을 다시 리뷰(re-view)해볼 수도 있고, 내가 살았던 그 동네에 찾아가 소녀가 흘렸던 눈물 자국을 느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동래구 복천동에 가서 나혜석의 글을 읽는다면 어떠한 감흥으로 다가올지도 궁금하다. 복천동은 100여 년 전, 나혜석이 시댁살이를 했던 곳이다. 당차게 <이혼고백장>을 날렸던 나혜석에 비해, 아무런 글을 남기지 못했던 나혜석의 시어머니가 골목 어디에선가 말을 걸어올 듯도 하다.


각본 없이 움직일 수도 있다. 그냥 동네 책방에 가서 마음이 끌리는 책 한 권을 고르는 것이다. 하지만 내키는 대로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치는 대신 “그 책을 어디서 읽을 것인가”를 신중하고 섬세하게 고민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책이 어우러진 장소에서 말 걸고 귀 기울였던 체험을 써보려 한다.
 
* 김 작가님, 계 사장님, 쑥 반장님 세 명의 수다 또한 조화롭다. 서로가 서로에게 추임새를 넣어주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에서 공독(共讀)의 즐거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역마살 독서단> 프로젝트는 ‘2018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 서점 지원사업’으로 제작되었고 현재는 계속되고 있지 않다. 하지만 또 기회가 된다면 부산 여기저기를 발굴해 주기를, 예상치 못한 장소에 책을 포개어주기를 한 명의 팬으로서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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