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천동에서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읽다
“버섯과 같은 집,
먼지 나는 길 원시 그대로 있다.”
복천동 고분군은 잔디로 뒤덮인 아담한 동산 모양을 하고 있다. 가야인들의 무덤이 발굴된 거대한 묘터는 이제 산 사람들의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는 중이다. 산책로 한 편에는 당시 발굴 현장을 재현해 놓은 곳이 있는데,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순장(殉葬)의 흔적이다. 깨어지고 부서지고 때로는 온전한 모습으로 잔뜩 나뒹굴고 있는 토기들을 보면, 원치 않게 묻혀야 했던 이들의 몸부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산 채로 묻히기도 했을까? 그랬다면 그것은 내가 아는 최고의 형벌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현재 전해지는 바가 없다.
사회적 매장 또한 산 채로 묻히는 일이다. “나는 자기를 참으로 살릴 때는 죽음이 무섭지 않사외다. 다만 자기를 다 살리지 못하였을 때 죽음이 무섭습니다.”(195-196)라고 말했던 나혜석의 이야기다. 수원의 갑부집 딸로 태어나 당시 일본 유학까지 하며 서양미술을 배워와 첫 개인전을 열고, 조선 여성 최초로 구미를 유람했던 나혜석은 53세 나이에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한다. 화려함과 비참함이 극단적으로 대비되어 보이는 그 인생을 사람들은 흔히 ‘불꽃’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 타버리지는 않았다. 100년이 지난 후에도 우리는 나혜석의 목소리를 아주 생생하게 들을 수가 있다. 자기 인생의 굴곡과 면면들을 소설, 기행문, 에세이, 신문 좌담회, 기사 등으로 풍성히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은 군데군데 흩어지고 단편적으로 잊혔던 글들을 하나로 엮은 책이다. 나혜석은 그림으로 일가(一家)를 이루고자 했지만 현재 몇 점 남아 있지 않고, 결국 남긴 글들이 나혜석을 부활시킨 셈이다.
과연 100년이 지난 지금 나혜석은 제대로 이해받고 있을까. 폴리아모리(polyamory)를 암시하는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210)와 같은 발언은 지금도 충격적일 만큼 과감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장을 더 읽어보면 어떨까.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나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200)
나혜석은 파리에서 잠깐 나눈 연애의 결과가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많은
남성들이 그래 왔듯이 자신도 공평하게 면죄부를 받고 싶었던 것 같다. 이참에 위선과 모순 다 까발려보자 싶은 심정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억울한 마음에 ‘삼천리’에 <이혼고백장>을 게재하고, “나는 공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남편과 이혼은 아니하렵니다.”(169)라고 말했던 최린에게 정조 유린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묻혔다. 나혜석은 산 채로 묻히고 말았다. 나혜석은 제대로 된 재산분할 및 면접교섭권을 갖지 못한 채 이혼당했다.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까지 표현했던 과감한 발언은 자식들을 품에 안을 수 있었던 시절에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어머니와 예술가의 정체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나혜석은 세계 유람 이후 아이들의 개성에 눈이 뜨이고 그들의 앞길을 지도할 자신이 생겼다고 고백한다. 유럽 각국의 명화들을 맨눈으로 섭렵한 이후라 예술에 대한 포부도 더욱 커졌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인해 모든 포부가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나혜석은 전남편 김우진에 의해 철저히 아이들과 분리됐고, 몰래 멀찍이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아이들의 성장을 자기 손으로 도울 수가 없었다. 화가로서 끊임없이 재기하려 애썼지만 그림은 불타버리고 사람들은 외면했다. 사회적 매장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어미 손에 자라야 한다고 거듭 말했던 이는 나혜석의 시어머니였다. 결혼할 때부터 ‘시어머니와 별거케 해달라’고 요구했던 당돌한 며느리, 세 아이를 맡겨두고 1년 8개월 동안 세계여행을 떠났던 며느리, 자기 아들을 두고 딴 남자와 바람을 핀 며느리지만 그래도 아이들 어미로서는 받아주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12일 오전 8시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친척들과 노모, 세 아이가 마중 나왔다.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눈물도 아니 나오고, 감상이 이상스럽다. 자동차로 동래에 돌아왔다. 1년 8개월 전에 보던 버섯과 같은 집, 먼지 나는 길 원시 그대로 있다.” (조선 여성 세계 일주기, 225)
시베리아의 오로라와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을 눈에 담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스케치 박스를 들고 아카데미를 다니며, 인디언들이 ‘천국으로 통하는 길’이라 불렀던 그랜드캐년까지 유람하고 돌아왔던 나혜석의 눈에 동래는 ‘버섯’과 ‘먼지’로 묘사된다.
나혜석의 시어머니가 살았던 곳, 그리고 나혜석이 세계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잠시 살았던 동래구 복천동 일대는 조만간 재개발되어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복천동 고분군에서 동네를 내려다보면, 기와지붕을 파란색 우레탄으로 방수공사를 한 집들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내려가 골목골목을 돌아본다.
혹시 여기였을까. 이 집이었을까. 백 년 전 그 집이 그대로 있을 리 만무하건만 꼭 이 집이었을 것 같다고 마음대로 추정하며 오래된 집 앞에 섰다. 몇 해 안에 포클레인이 이 집을 사정없이 부술 것이다. 지하에서 어느 시대의 무엇이 출토될지 아직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