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을 내려놓고 내일로 가기 위해선
어렸을 때는 매일 일기를 적었습니다. 힘들었거든요. 이 마음을 어딘가에 털어놓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친구들과 많이 만나고 술을 마셨던 것도 같습니다.
이야기를 하고 나면 조금 괜찮아졌으니까요. 아마 그때에 마음과 고민, 그리고 이야기에도 무게가 있다는 걸 알게 됐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일기를 적지 않습니다. 아니오. 견딜만한 것은 아닌데, 그냥 적지 않습니다. 그것마저도 피곤하고 힘든 날들이 많거든요.
대부분은 하루를 돌아보지 않으려 합니다.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피로해지는 날들이 많아요. 그저 흘려보내려 노력합니다. 가끔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날들이 있어서 그럴 때만 가끔 일기를 적습니다.
여전히 친구들은 만나면 좋지만 이따금씩 친구들마저도 피곤한 날이 있어요.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쏟아내고만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가끔 있거든요. 그럼 괜히 피곤한 생각이 들고 일찍 헤어지게 됩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친구도 지쳐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겠죠. 어쩌면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 서운해서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흘려보내고 나면 다시 또 괜찮아져서 웃으며 보게 되는 게 친구더라고요.
여기는 술도 음식도 마음에 듭니다. 맛있네요. 적어도 먹고 마시는 순간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아주 맛있어요.
머리가 복잡한 날에 다시 방문해서 아무 생각 없이 술과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네, 아주 맛있습니다. 분위기도 좋아요. 아마 이 분위기 때문에 더 맛있는 지도 모르겠네요.
단 둘이라면 어쩌면 좀 부담스럽고 나도 모르게 깊은 이야기를 해버릴 것만 같은데 셋이라서 그런가 조금 편안하게 이야기를 해도 될 것만 같고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모르는 사람이라서 좋습니다. 편하게 이야기를 하고 잊어도 될 것만 같아서. 그런데도 제 이야기를 이렇게나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래서 좋은 걸까요. 어쨌든 여기 참 좋네요.
제 정장이요? 어렸을 때 큰맘 먹고 샀던 정장인데 이제는 좀 작습니다. 저도 이렇게나 오래 입게 될 줄 몰랐어요. 알았다면 조금 더 넉넉한 크기로 살 걸 그랬다는 생각이 가끔 듭니다.
어떤 자리를 가도 항상 동생인 나이에 샀는데 조금씩 형이 되는 나이가 되니 꼭 정장만 입고 다닐 필요는 없더라고요. 필요한 자리가 아니면 꺼내지 않다 보니 정장을 더 살 필요도 없어졌어요.
더 나이가 들면 아저씨들처럼 등산복에 정장 마이만 입어도 충분하게 되겠죠. 아주 가끔은 멋있는 정장을 입고 싶지만 이제는 필요성에 따라서 옷을 사는 지경까지 와서 망설이다 포기하게 됩니다.
오늘은 친구 결혼식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초등학교 친구인데 친하다고 말하고 다닙니다. 사실 마음으로는 친한지 아닌지 조금 헷갈리는 친구입니다.
첫 번째로 생각나는 친구는 아닌데 막상 만나면 서먹한 사이는 아니라서요. 둘이 만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는 아닌데 그렇다고 대화 사이의 침묵이 신경 쓰이는 친구는 또 아닙니다.
애매하죠? 이게 이해인지 무시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는 사이의 친구입니다. 가끔은 이런 관계의 친구가 더 편할 때도 있더라고요.
초등학교 친구의 결혼식이라 오래간만에 보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어렸을 적 친구들이다 보니 반가웠죠. 처음에는 말이죠. 안부를 묻고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내용이 깊어지니 조금씩 불편해지더군요.
십 년도 넘은 인연을 다시 만나서 반가운 건 사실이지만, 제가 반가운 건 어렸을 적 그 순수했던 관계를 기억하기에 반가웠던 건가 봅니다. 이야기를 할수록 그때의 친구들이 아니라서 조금 불편했던 거겠죠.
이야기를 하다가 알게 됐는데 신랑이 친구에게 말해서 연락을 좀 돌려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동창들이 더 많이 오게 된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한 명, 두 명과 이야기할 때는 조금 불편한 것들도 생겼지만 그게 스무 명이 넘어가는 순간부터는 깊게 이야기할 시간조차 없더군요.
어어? 하는 순간에 휩쓸려서 한마디 하고는 그저 불려 다니는 대로 가서 소개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이야기하면 끝이었습니다. 나중이 되니 이게 결혼식장인지 동창회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덕분에 재미는 있었습니다.
신랑 측 하객이 지들끼리 워낙에 북적이고 와글거리니 사회자가 사진 찍은 사람들이 아니면 미리 밥 좀 드시고 오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회자도 저희 동창이었는데 신부 측 손님들에게 발 디딜 틈도 없다고 항의를 받은 눈치더라고요.
아무튼 그런 통보를 받은 것도 처음이라 저희는 낄낄대며 미리 밥을 먹었습니다. 피로연장에도 모니터가 설치돼서 밥을 먹으며 식을 볼 수 있었죠.
밥 먹다가 사진을 찍기 위해 뛰어가는 놈도 있고 축가 부르고 오겠다며 접시 치우지 말아 달라고 하는 놈도 있었습니다. 하나 둘일 때는 어른인 척하던 놈들이 스무 명을 넘어서 홀을 채우고 쫓겨날 정도로 많아지니 하나같이 정신이 퇴행하는 듯했습니다.
어렸을 적처럼 순수해진 것이 아니라 퇴행이 맞습니다. 그 와중에도 직업을 확인하고 비교하고 벌이를 묻는 이들이 많았거든요. 그저 분위기에 휩쓸려, 혹은 자신의 기분에만 신경 쓰느라 가볍게 말하고 진상 부리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된 거죠.
뒤풀이는 더 거창했습니다. 이층짜리 술집을 통째로 빌렸습니다. 원래는 테이블 몇 개 예약만 했다던데 인원이 많아지니 대관으로 바뀐 듯했습니다. 이후는 당연히 신랑은 뒷전인 동창회가 됐죠.
신랑이 인사를 하러 오면 박수를 쳐주고 질문을 하긴 했지만 돌아야 할 테이블이 워낙 많으니 안부나 전하는 게 고작이었어요. 요즘에는 뒤풀이를 하고 신혼여행을 많이 간다고들 하던데 신랑은 인사만 하고 금방 신혼여행을 떠나버렸습니다. 덕분에 동창회는 그리 길지 못했습니다.
저에겐 아주 다행이더군요. 애들은 점점 취해가고 질문은 예의 없어지는데 서로 자기들 이야기만 하느라 바빠서 내 이야기는 들어주지도 않고 있었으니까요. 그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 게 멍청한 짓이란 건 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어렸을 때 친했던 이들이기에 어쩌면 저와 방향성이 맞지 않을까 싶었던 거죠. 확실히 방향이 아예 틀리진 않아서 이야기를 하는 내내 불편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이후의 사는 이야기와 앞으로의 관심사가 너무 다르더군요. 그건 살면서 변하는 거니 그저 감수할 수밖에요.
다수가 모인 자리가 다 그렇듯이 테이블 별로 이야기가 쪼개지고 또 그 테이블에서도 이야기의 방향성이 맞는 몇몇으로 쪼개져서 각자 이차를 떠났습니다. 술 취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리저리 튀듯이 그렇게 다들 각자의 이야기를 찾아서 흩어진 거죠.
저도 마음에 드는 이야기 한가닥을 따라서 이차를 갔다가 점점 깊어지는 사정들에 먼저 돌아왔습니다. 테이블에 미혼인 여자친구도 있었는데 남자 놈들이 중간중간 허세를 부리며 자신의 이야기를 부풀리는 것도 불편했고요.
커다란 줄기는 저도 공감할 수 있었는데 각자의 구체적인 사정에 들어가니 아무도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말만 하는 이 상황이 영 불편해지더라고요.
이들과 언제 다시 또 만날지 모르는데 굳이 이런 모든 이야기를 제가 들어주며 시간을 보내야 하나 회의감이 들더군요. 그래서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습니다.
확실히 어른이 되면 어떤 면의 인내심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모두가 같은 시간을 쓰는데 더 빠르게 성과를 내는 직원을 선호하듯이 저도 빠른 결말을 원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어렸을 때는 시간이 모자라면 내일 하면 됐지만 이제는 어떻게든 오늘 안에 끝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니까요. 내일은 내일의 일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도 잘 아는 나이가 됐으니까요.
그렇기에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떤 감정은 너무 무거워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못하게 하거든요. 그런 감정은 내려놓는 데에도 너무 큰 시간이 걸리더라고요. 조심스럽게 내려놓지 않으면 저도 다치고 마니까요.
사실 오늘은 그래서 일기를 좀 쓸 생각이었습니다. 왁자지껄 했던 결혼식과 어릴 적 친구들과의 만남, 그리고 그 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혼자로 돌아오는 제 모습이 뭔가 답답했거든요. 그걸 실망감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뭔가를 기대하고 바랐던 것은 분명한데 그 기대감이 충족되지 못한 자리에 들어찬 이 기분은 실망이라기에는 너무 거창하니까요. 아니, 그 기대감이 충족되지 않을 거라는 걸 예상했기 때문에 실망이라는 단어를 쓰기 싫은 거일 수도 있겠네요. 세상을 살면서 기대대로 되는 경우를 거의 못 봤거든요.
어쩌면 상실감이나 허탈함에 가까울 수도 있겠어요. 어렸을 때의 친구들이라면 이 정도도 이해 못 해주나 싶은 그런 마음일지도 모르겠어요. 대화의 기본이니까요. 이야기를 듣는 것은.
분명히 어렸을 땐 함께 듣기, 말하기를 배웠는데 왜 모두 말하기만 하느라 바쁜지 모르겠거든요. 어쩌면 어른이 되어서 그런 걸까요. 더 빠른 결말을 원하기에 다들 말하기만 하는 걸까요?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전 오늘 집에서 일기는 쓰지 않아도 돼서 기쁩니다. 일기를 쓰는 날은 답답한 가슴을 어디에도 풀지 못한 날이라서 하루를 돌아보며 무거운 마음을 일기에 내려놓는 날이거든요. 그렇게 하루의 기억과 하루의 감정을 천천히 내려놓아야 다시 내일은 어느 정도 가볍게 출근할 수 있거든요. 물론 완전히 가볍지는 않지만요.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거 같아요. 하루의 기억, 그리고 하루의 감정마저도 다 오늘에 내려놓고 내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렇게 해야 서로 간에 문제없이 사회를 이루고 구성원으로 일할 수 있으니까요.
어른처럼 행동하고 예의 있게 행동하며 사적인 감정의 개입 없이, 일은 일대로 처리한다는 건 그런 거니까요. 오늘치의 감정을 다 내려두고 내일로 가는 것. 가끔은 그게 너무 힘들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