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어떤 밤의 꿈 상영회(2)

- 꼰대가 된 당신이 주인공으로 살던 법

by 블랙스톤

가장 어리고 순수할 때를 보여주던 꿈은 천천히 밝아져 온통 하얀빛만 가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변화 없이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온통 하얀 공간 속에서 그는 처음엔 불안했으나 이내 적응하여 주변을 둘러보던 시선을 안으로 돌렸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그 공간 속에서 가만히 지금까지 보았던 장면들을 곱씹었다.

하얗게 비어있는 공간 속이었으나 무섭거나 답답하진 않았다. 은은하게 퍼져있는 하얀빛이 창백하거나 눈을 찌를 듯 밝게 느껴지지 않았기에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한 느낌마저 들어서 편안히 앉아 지금까지의 장면들을 아주 천천히 되새김질할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이 되새김질이 끝나면 다음 꿈을 꾸게 될 것이란 걸 알았다.


한참이나 꿈을 되새겨, 자라나는 동안 잃어버렸거나 잊고 있던 것을 돌아본 후에, 그는 지금까지의 삶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피를 토할 만큼 열심히는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은 열심히 살았다. 다시 돌아가 보고 싶은 순간들은 있었지만 다시 한번 살아갈 이유까진 없는 그런 삶. 무엇보다도 두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지금이 좋았다.


무게추. 두 아이들과 아내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무게추가 되어 주었다. 쓰러지지 않도록, 매번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주는. 그리고 지금까지 그가 달려온 것은 이 무게추를 얻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게 되자 고마워졌다.

아이가, 아내가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라는 것은 알았지만 막연하게 생각만 했을 뿐 어떻게 지탱하는지는 몰랐다. 그저 삶의 보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그의 인생을 단단하게 지지해 주고 엇나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었으며 그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게 해 주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의 인생의 주인공은 아이들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이들과 아내는 가족이란 이름으로 그의 무게추가 되어 주었다.

아버지란 이름을 가지게 된 그를 더 단단하고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내는 더욱 현명하고 성숙해졌으며 강인해졌다. 아이들은 그들의 보호아래 더 많은 것을 배워나갈 수 있으리라.

그들은 서로의 무게추가 되어 서로의 중심이 되어주었다.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그까지 모두 주인공이었다. 때론 개인으로 그리고 때론 가족이란 팀으로 함께하는 주인공들이었다.

그는 뒤로 드러누웠다. 기분이 좋았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끝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괜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꿈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몽롱하게 변하던 장면은 그가 감정을 모두 추스른 후에야 명확하게 대학 시절의 그를 보여주었다. 정확히는 군 제대 후 선배로서의 대학 시절.

마주치는 후배들은 마냥 어려 보이고 동기들은 취직하는 시기. 막연한 미래는 불안하지만 반대로 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여겼던 시기. 긍정적인 미래를 믿으며 하염없는 준비과정을 버티던 시기.

그는 매일 새로워지는 것들에 적응하고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의 그는 미래의 불안함을 더 노력하는 것으로 달래고 있었다.

언제나 내 편인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여자친구가 그의 자존감, 그리고 자부심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 덕에 그 시기를 잘 버텼다고 생각했다.


꿈속에서 젊은 청년인 그는 잠시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전화기를 들었다. 몇 번의 통화음이 지나고 그는 합격했지만 사정으로 인하여 입사를 포기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전화를 받은 상대방은 잠시 당황하다가 인적사항을 확인하고는 알겠다, 대답하고 끊었다.

고민은 길었지만 대답과 절차는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그가 허탈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한참이나 핸드폰을 주머니로 넣지 못하고 벤치에 앉아 있었다. 여자친구의 권유로 끊은 담배가 절실히 생각나는 날이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큰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겼음에도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세상은 돌아가고 날은 밝았으며 걷는 사람들은 바삐 지나가고 있었다.

전화를 걸기 전까지는 마치 배경음이라도 깔린 듯 오직 핸드폰만 보이고 자신을 둘러싼 공기마저 무겁게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자신에게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날은 따스했고 사람들은 각자 바빴다. 가끔 부는 바람만이 귓가에 공허하게 들릴 뿐이었다.

대낮에 공원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는 것은 자신과 저 멀리 벤치에 앉은 노부부뿐이었다. 어쩌면 나 크게 실수한 거 아닐까. 겁이 더럭 났다. 지금이라도 전화를 해서 되돌리고 싶어졌다.


최종 합격 통보를 받고 무엇보다 기쁜 것은 부모님이 은근히 자랑하며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대기업 취직이란 것은 그런 것이다. 모두가 바라고 자랑하는 그런 것.

좋은 대학. 대기업. 부모님이 기뻐하실 때마다 그는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에 어깨가 한참이나 올라가곤 했다. 그런데 대학 때와는 다르게 이번 성취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꾸 조금 늦게 면접을 본 다른 대기업으로 눈이 갔다. 진짜 가고 싶었던 것은 뒤의 회사였다. 심지어 그곳은 일차 면접만 붙은 거라 최종면접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최종면접을 보지도 않은 회사 때문에 이미 합격한 곳을 포기한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니다가 이직한다는 것은 양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차피 입사하면 최종 면접에 갈 시간을 낼 수도 없겠지만.

그는 미련을 끊기 위해 친구들과 더 크게 떠들었고 부모님 앞에서 더 어깨를 치켜세웠으며 여자친구 앞에서 더 기뻐했다. 그리고 여자친구는 그의 손을 잡고 가만히 말했다. 괜찮아. 뭔데. 하고 싶은 말 해봐. 내가 널 몰라? 괜찮으니까 말해. 말하고 싶은 거잖아.


말을 하고 나면 후련한 것이 아니라 더 미련이 생길 것 같아서 그는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여자친구는 그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미련이 생겨. 어차피 미련이 생길 거라면 속 시원하게 다 말해버려.


그날 밤 그는 그녀에게 속을 다 털어놓았다. 해보고 싶은 것은 뒤의 회사에 있는데 확신이 없다고. 이미 합격한 앞의 회사도 대기업이고 그냥 다니다 보면 잘 적응해서 다닐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그녀는 그의 말을 끊지 않았다. 그저 손을 꼭 붙잡고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만 하고 정리해 본 적도 없이 주저하고 있던 것들까지 모두 말할 수 있었다.


분명히 합격한 회사를 다니는 것도 잘할 수 있겠지만 관심사는 뒤쪽의 회사가 더 밀접하니 그쪽이 낫지 않을까 싶다고. 십 년 이십 년 후에도 다니려면 아무래도 관심사에 가까운 회사가 낫지 않을까 싶다고.

둘 다 손에 꼽히는 대기업이고 월급도 비슷하니 둘 다 된다면 뒤쪽의 회사에 가고 싶다고. 물론 된다는 가정 하에.


말을 끝마치고 그는 약간의 후련함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이 조금 정리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고맙다고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너라면 할 수 있어. 항상 나는 너를 믿어. 내가 말했잖아. 자기는 마음먹으면 다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자기야. 난 자기가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좋다고 생각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지. 내가 먹여 살려야지. 대신 다음에는 좋은 곳에 붙으면 꾸준하게 다니기야?


그는 아니라고 몇 번이나 거절하다가 그녀가 그를 꼭 안고서 괜찮다고, 대신 더 노력해 달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이 여자는 내게는 과분할 만큼 아름답다고 느꼈다. 이 여자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때였다.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믿어주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힘든 일이 있어도 함께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는 지금의 아내가 된 여자친구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꿈속에서 그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눈을 통해 마음에 새겨 넣었다. 연애시절부터 결혼 이후까지 언제나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 주고 대단하다고 말해주는 그녀. 새삼스럽게도, 여전히 그녀는 아름다웠다.


친구들은 미쳤냐고 물었다. 그리곤 이내 알아서 하라는 반응이었다. 부모님은 뭔 소리냐는 반응이었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어머니에게 등짝이라도 몇 대 맞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힘 빠진 얼굴로 알았다고만 하셨다. 왠지 그게 더 마음을 흔들었다. 큰 잘못을 한 듯한 기분. 하지만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뒤의 대기업에 합격하면 된다. 그러면 다시 즐거워해주실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따서 갚는다는 도박 심리과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자신이 더 잘 준비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벤치에서 그는 후회하고 있었다. 막상 저지르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뭔 짓을 한 거지 싶은 마음도 들었다. 불안한 마음에 핸드폰을 쳐다보느라 그녀가 다가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가만히 옆에 앉아서 그를 안아주었다. 괜찮아. 자긴 잘할 거야. 걱정 마.


그리곤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를 잡아끌었다. 저녁에 식당을 예약해 두었으니 그전에 영화를 보자며 활달하게 말했다. 오늘은 자신에게 집중해 달라고.

여전히 대낮의 공원에는 사람이 없었다. 저 멀리 벤치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는 노부부와 힘든 결정을 한 내 곁에 있어주겠다고 연차까지 내고 찾아온 그녀뿐.

이 밝은 세상 위에 등장인물은 딱 넷 뿐이었고 나는 다시 오롯하게 내가 주인공이 된 느낌을 받았다. 어허, 집중! 이렇게 예쁜 여자 두고 자꾸 딴생각할래?


팔짱을 끼고 올려다보며 말하는 그녀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그제야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고 있는 사람을 알았다. 그리고 무엇이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세상에 밀려 쪼그라들지 않게 해주는 것은 나를 무제한적으로 믿어주는 사람들이다. 그 믿음이 곧 내 자존감이 되어준다. 그는 그녀와 발맞추어 걸으며 그녀의 믿음에 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걸으며 벤치에 앉은 노부부들이 가까워 올수록 그들을 내리쬐는 햇빛이 빛났다. 마치 빛의 샤워를 받는듯한 그들은 그 자체로 주인공들이었다.

언젠가 나도 그들처럼 그녀와 함께 느긋하게 앉아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느긋하게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세월에 밀려난 것이 아니라 세월을 함께 지내고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렇기에 그는 더 많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반대손으로 팔짱을 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배시시 웃었다.


젊은 그도 늙은 그도 그런 그녀를 보며 웃었다. 그 얼굴은 주변의 하얀빛처럼 은은하고 따뜻하게 빛났다. 늙은 그에게서 젊은 그의 얼굴처럼 미래에 대한 확신이 번져나간다. 청춘만화의 주인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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