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어른이 된다는 건(2)

- 오늘을 내려놓고 내일로 가기 위해선

by 블랙스톤

손님은 마지막 잔을 마시고 마지막 한 조각의 안주까지 싹싹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짝 비틀거리며 기분 좋게 인사를 한 손님이 왔던 문으로 나가는 것을 보며 쁘니가 꼬리를 살랑이며 배웅인사를 했다. 냐앙.

쁘니의 말에 마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쁘니는 코를 바짝 치켜세우며 에미를 바라보았고 에미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었다.


“어디가 거짓말이었는데?”


쁘니는 뒷발로 일어서더니 앞발로 커다랗게 원을 그렸다. 마치 전부다라고 말하듯이. 마스터는 그것을 보며 고개를 저었고 이번에는 에미가 코를 바짝 들었다.


“전부는 아니라고 하시잖아. 아는 척하기는.”


쁘니는 슬쩍 마스터의 눈치를 보며 에미에게 그르렁거렸다. 에미도 즉시 쁘니에게 다가가 이마를 맞대며 말했다.


“내가 틀린 말 했어? 그리고 네가 먼저 나 무시했잖아.”


마스터가 한숨을 쉬든 말든 에미와 쁘니는 언제나 그랬듯 서로의 머리를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잠시 기다려도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다툼에 마스터는 닦던 잔을 홀더에 걸어두고 나서 바를 두드렸다.

그 똑똑하는 소리에 쁘니는 에미의 볼을 발로 때리던 채로, 에미는 쁘니의 볼을 쭉 잡아당기던 채로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오늘의 손님이 나가셨으니 일단 정리부터. 둘 다 내쫓기 전에.”


조금의 감정도 실리지 않은 마스터의 말에 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에미는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서 설거지를 준비했고 쁘니는 뒷발로 일어서더니 잔을 들고 주방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마스터는 앞발로 잔을 들고 서서 뒤의 두 발로 잘만 걷는 쁘니의 씰룩이는 엉덩이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영물靈物의 조짐만 있었을 뿐인데 무림에서 무슨 깨달음이라도 얻은 건가.”


마스터의 혼잣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쁘니는 주방에서 도약해서 허공을 세 번이나 딛고 바의 의자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칭찬을 바라는 듯 눈을 순진하게 뜨고는 마스터에게 애교 섞인 말을 건넸다. 야옹. 냥.

마스터는 피식 웃고는 슬쩍 쁘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쁘니는 기분 좋다는 듯 그 손에 몇 번 더 몸을 문대고는 이내 다시 두 다리로 서서 앞발로 접시와 나머지 식기를 옮기기 시작했다.


마스터는 쁘니의 목에 걸린 방울과 에미의 기분에 따라 머리두건이 되어버린 감투를 바라보았다. 변화는 저 ‘도깨비감투’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감투에 넣은 길잡이 기능은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는데 그것이 다른 방향의 길잡이가 될 수 있는지는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야기 도깨비’는 어쨌든 ‘이야기’가 풍부해질수록 꺼낼 수 있는 재주가 늘어나는 법이니까. 길잡이를 통해 이야기에 접근하는 방식을 배운다면 당연하게도 길잡이를 통해 이야기에서 얻은 재주를 쉽게 사용하는 법도 배울 수 있겠지.

하지만 ‘에미’보다도 ‘쁘니’가 더 ‘이야기’의 활용에 익숙한 것은 아마도 이제는 확고하게 영물이 되었다는 뜻이리라. 마스터는 조금 더 쁘니에게 자신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거짓말이었다고요?”

“정확하게 말하면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 그저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말한 거란다.”

“그럼 거짓말쟁이는 아닌 거네요?”

“자신의 이야기가 어떻게 들릴지도 알고 어떤 식으로 왜곡될 지도 예상했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니 괜찮은 걸까? 그리고 모두 진실만을 말한 것도 아니었지.”

“뭔가 어렵네요. 그런데 속을 털어놓게 만드는 음식과 술을 마시고도 그렇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는 거였어요?”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단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이 믿고 있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믿으며 파생되는 모든 것들의 결과를 상대 탓으로 치부해 버리는 사람들이.”

“무림인도 아니고 현대인이 그럴 수가 있나요? 무림인이야 눈앞에서 친지가 죽어 나가는 일들이 생기니까 자신에 대한 맹신으로 살아간다지만 현대는 피가 튀기는 세상도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렇기에 더 자신에 대해 맹신할 수 있지. 자신의 한계를 보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거든.”

“그래서 선물도, 이야기도 주지 않으신 건가요?”

“그는 분명히 ‘이바구’로 향할 만큼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단다. 비록 왜곡되었을지라도 자신이 믿는 바대로 최선을 다해 내게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고. 그랬으니 ‘이바구’에서도 뭔가를 전해주기는 할 거다. 다만 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단다.”

“손님은 이미 가셨는데요?”


니아아야압. 진지한 대화 중에 끼어드는 쁘니의 한심스럽다는 울음에 에미는 재빠르게 손으로 쁘니의 입을 막았다. 쁘니가 바로 전투태세에 접어들 때 마스터의 이야기가 한발 먼저 들려왔다.


“그가 이야기를 끝마치지 않았기에 ‘이바구’에 더 이상의 손님은 없을 거란다. ‘이바구’는 단 하나의 손님만 받는 곳이잖니. 손님이 자리를 비웠어도 이야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그는 아직 ‘이바구’의 손님이란다.”

“어어. 그러면 우리는 잠정적인 휴업상태가 되는 건가요? 저 놀아도 되나요?”


천천히 말하던 에미가 뒤의 ‘놀아도’를 말할 때에는 이미 눈을 빛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쁘니는 입이 막힌 상태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마스터도 쯧 하고 혓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지금도 충분히 쉬고 있지 않니.”

“그래도 뭔가 일하는 시간이 쉬어도 된다고 하면 기분이 더 좋단 말이에요.”

“…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된다. 그리고 산책 겸 해서 손님에게 다녀오너라.”


마스터의 허락에 에미는 제자리에서 뛰어가며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스터는 슬쩍 고개를 돌리며 이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쁘니만 볼 수 있게끔 손짓을 했다. 에미가 춤추는 모습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던 쁘니는 천천히 일어서서 마스터를 따라 이층으로 향했다. 야아아아앙.

마스터는 쁘니의 작은 속삭임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며 쁘니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이번에는 감투 같은 물건이 아니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뭔가를 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내 이야기보따리에서 배워가는 거란다.”


냥냥냥. 짧게 울며 기분 좋음을 표현한 쁘니는 마스터의 다리에 몸을 비비며 그를 따라 이층에 올랐다. 일층의 바 홀에는 여전히 춤추며 오늘부터 내일까진 난 쉰다아! 라고 반복 노래를 부르는 에미만이 남아 있었다.

마스터의 배려인지 에미의 목소리에 맞춰 적당히 신나는 반복 리듬의 음악이 에미의 흥을 북돋았다. 그래서 춤은 한참이나 멈추지 않았다.


이층에서 내려온 쁘니는 꼬리를 반짝이게 할 수 있는 재주를 배워왔다. 꼬리가 반짝일 때마다 신기한 에미가 조심스레 만져보았지만 아무런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아, 이번에 가야 할 곳은 어두컴컴한 곳인가? 그래서 쁘니에게 꼬리에 불 켜는 법을 가르쳐주신 건가? 언제나 그랬듯 생각하는 것이 다 얼굴에 티가 나는 에미를 보고 쁘니는 혀를 찼다. 이제는 고양이라는 자각도 없는 듯한 쁘니였다.

마스터는 문 앞에서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왔다. 에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쁘니를 가리켰다. 쁘니는 자신을 가리킨 손가락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살짝 그르렁 거렸지만 에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쪽은 어두운 곳인가요? 쁘니가 조명이 됐어요.”

“그런 기능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구나. 빛이 나는 건 쁘니의 성향 덕이다. 좋은 재능과 성실한 태도를 가졌기에 주는 내가 만족스러울 정도로 챙겨 가더구나.”


냥냥냥. 쁘니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마스터의 다리에 자신의 몸을 비볐다. 에미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살짝 볼을 부풀렸다가 마스터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했다.

마스터는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고 문 앞에서 에미는 가볍게 손을 머리에 얹어 모자를 볼캡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이미 문을 연 쁘니가 움직이지 않는 에미를 올려다 보아도 에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에미는 슬쩍 고개만 돌려 마스터를 간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마스터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튕겨 에미의 옷을 바꿔주었다. 볼캡을 쓴 에미의 옷은 맨투맨과 약간 러프한 느낌의 팬츠로 바뀌었고 그에 대한 마스터의 감상은 간단했다. 바지 통이 너무 넓어서 거리는 다 쓸고 다니겠군.


에미는 어지간히 옷이 맘에 들었는지 잠시 제자리에서 춤을 추다가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나섰다. 빛을 뿜던 문이 곧 닫혔고 마스터는 아무도 없는 바에서 가만히 문을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에미가 돌아오면 옷을 바꿀 수 있는 선물을 준비해야겠다고.


몸을 돌려 바 안쪽의 흔들의자로 향하면서 에미에게 줄 선물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웃겨서 마스터는 살짝 웃음을 흘렸다.

인간적인 도깨비라. 세상에 이만큼이나 모순적인 존재는 없으리라. 애초에 도깨비라는 존재 자체가 필요하지 않은데도 태어난 존재이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직 한 가지에 집착하는 도깨비. 그런 도깨비가 인간성이라. 나도 너무 오래 살았군. 마스터는 가만히 혼잣말을 내뱉다가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들었다. 하지만 도저히 글을 읽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하나의 재주도 배우지 못하는 에미. 그를 대신해 재주를 잘 배워줄 수 있는 쁘니. ‘이바구’의 권한을 모두 알고 있는 에미, 그리고 보조할 수 있는 쁘니. 하나라면 홀로 서기 힘든 이들이지만 함께라면 홀로 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섣부른 생각이지만. 어쩌면. 어쩌면. 드디어.


“드디어 매일 반복되는 오늘이 끝날 수도.”


막상 내뱉고 나니 그 단어의 묵직함이 마스터의 가슴을 짓눌러왔다. 그 무게를 털어내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일. 아주 낮은 가능성의 일이다. 그럼에도 마스터는 도저히 책을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참이나 문쪽을 바라보았다.

문득 손님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어른이 된다는 건 하루의 기억, 감정을 모두 오늘에 내려두고 내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던 그의 말.


그가 스스로 어쩔 수 없이 믿고 있던 그 말은 자신의 미래를 자조적으로 느끼는 바이기도 했다.

오늘의 마이너스적인 감정들이 내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자신의 미래에 좋은 일이 없을 거라는 미묘한 확신.

경험적으로 좋은 일들보다는 나쁜 일이 더 많았다는 편향적인 확신.

그것이 그에게 일종의 맹신을 준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만 살고 있는 너무 늙어버린 도깨비에게는 그저 어린아이의 칭얼거림처럼 느껴졌다.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 그들을 탓하는 그 자신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던가. 마스터는 몇 번이나 그의 진실된 마음을 들어주려 하였으나 그는 끝내 자신이 믿는 맹신으로 남의 탓만 했다.

그는 결국 간절한 마음으로 '이바구'의 문을 열어놓고서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을 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바구'를 찾을 만큼 간절한 마음은 진짜였기에 아주 간단한 참가상 정도는 있을 예정이었다.


제복을 제 발로 걷어찬 흔한 손님이었지만 왠지 그 손님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마스터는 손님의 사고방식이 어떤 식으로든 오늘에만 머물러야 하는 자신이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랬기에 더 칭얼거림처럼 느꼈는지도 모른다.


마스터는 잠시 눈을 감았다. 내일이 있던 시절의 마스터는 진취적인 사람이었다. 오늘과 내일이 이어져 더 나은 미래로 향하게 된다는 것을 믿었다. 그것을 그를 끊임없이 도전하게 하고 부딪히게 했다. 상처가 나고 깨져야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아픈 곳을 보호할 수 있게 된다.

손님이 가진 맹신은 결국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일 뿐이다. 그것이 오래되면 딱딱하게 굳은 껍질이 되고 결국 그 안에 갇히는 건 스스로가 되어버린다. 이미 그 딱딱한 껍질 안에서 살고 있기에 마스터는 확언할 수 있었다.


감은 눈을 뜬 마스터는 곧 책을 펼쳤다. 너무 오래 살아온 이야기 도깨비에게 하나의 이야기가 정리되는 순간은 하나의 세계가 책장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과 같았다. 모든 상념과 격동이 사그라들었다.

고요해진 그의 심상에 따라 바는 정적에 휩싸였고 공허하고 우울한 재즈가 나른하게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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