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어른이 된다는 건(3)

- 오늘을 내려놓고 내일로 가기 위해선

by 블랙스톤

도착한 날은 화창했다. 겨울의 초입이기에 날이 쌀쌀하기는 했지만 햇볕이 따뜻해서 돌아다니기 나쁘지 않은 날씨였다. 게다가 처음 발을 내디딘 곳이 공원의 한편이었기에 에미는 기분 좋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

쁘니도 한쪽에 앉아 잠시 털을 골랐다. 그러자 금방 에미의 볼캡에서, 쁘니의 방울에서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그 ‘감투’의 가이드를 따라서 걷기만 하면 금방 이야기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둘은 잠시 눈을 마주친 후 ‘느낌’이 오는 방향을 따라 공원을 걸었다.


쌀쌀한 날씨에도 따뜻한 볕 덕에 산책하는 이들이 꽤 보였다. 평일임에도 함께 산책하는 이나 반려견을 이끌고 길을 나선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그들은 고양이 한 마리와 걷고 있는 그녀를 흘끔 바라보고는 이내 자신들의 길을 걸었다. 이야기를 마저 듣기 위해 걷는 그녀는 현재 '이바구'를 걷는 것과 같았기에 모두의 관심을 비껴서 걸을 수 있었다.

그런 것을 느끼는지 느끼지 못하는지 그저 에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뜻한 볕 사이로 걷는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가끔은 종종걸음을 치고 가끔은 한 발로 깡충깡충 뛰기도 하면서 자신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냐아앙. 쁘니의 한심스러워하는 울음소리도 그저 한 귀로 흘려 넘길 만큼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막상 한심스럽다는 울음을 낸 쁘니조차도 가끔 걸음을 멈추고 냄새를 맡아보고 벤치 위로 뛰어올라 잠시 볕과 바람을 느끼곤 했다. 꼬리가 연신 살랑거리는 것이 쁘니 역시 기분이 좋은 듯했다.


공원의 한편에서 둘은 이야기를 시작했던 손님을 찾을 수 있었다. 손님은 한 여자와 벤치에 어색하게 앉아 있었는데 그의 이야기를 경험했던 둘은 그녀가 동창회에서 만났던 여자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대번에 에미는 호오? 하는 흥미로워하는 소리를 냈고 쁘니는 음흉하게 웃으며 둘에게 다가가려 했다. 에미는 쁘니를 붙잡아서 들어 올렸다. 잠시만, 상황 좀 보고.

에미의 말에 쁘니는 뒷목이 잡힌 상태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에미는 쁘니를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렸다. 뱃살 덕에 안정감 있게 에미의 어깨에 올라 선 쁘니가 작게 울어 에미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가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들이 신경 쓸까 봐 하나의 의자를 건너뛰어서 그 옆에 앉은 둘은 안 그런 척하면서 귀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처음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다가 볼캡이 살짝 반응한다 싶더니 이내 둘의 긴장된 숨소리까지 또렷하게 들려왔다. 에미는 아주 작게 쁘니에게 속삭였다. ‘감투’ 성능 최고다. 쁘니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햇볕이 따뜻하니 좋다.”

“응. 좋네.”

“잘 지냈어?”

“응. 잘 지냈어.”


그리고는 긴장된 숨소리와 함께 침묵. 그러다가 와 저 강아지 봤어? 되게 잘생겼다!로 시작한 이야기는 응, 그렇네.로 마무리. 둘의 이야기를 잘 이어지지 않았다.

뭔가 이야깃거리를 찾으려 하는 것 같기는 한데 도무지 길게 이어지질 않았다. 에미가 쁘니의 귀에 속삭였다. 이거 이야기가 되는 거 맞아? 다음에 또 와야 하는 건 아니겠지?


쁘니는 작게 울어서 에미에게 걱정 말라고 말해주었다. 그걸 위해서 배워온 게 있다고. 쁘니는 훌쩍 뛰어서 둘에게 다가갔다. 에미는 당황하면서도 일단 쁘니의 행동을 지켜봤다.

쁘니는 둘에게 다가가서 몸을 살짝 틀고 앉았다. 마치 나는 너희 둘에게 관심은 없지만 근처까지는 갈 생각이 있다는 것만 같은 몸짓.

여자는 쁘니를 보고 귀엽다고 이야기했고 손님은 왠지 익숙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쁘니는 손을 내미는 여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가가 그 손에 몸을 비볐다.

여자는 귀엽다며, 털이 너무 부드럽다며 작게 탄성을 질렀고 에미는 생각했다. 마스터에게 배워온 게 애교 피우기냐.


손님은 연신 감탄하며 쁘니를 쓰다듬는 그녀를 보고 살짝 웃었다. 쁘니에게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것보다는 그녀의 행동이 더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그 사이 쁘니의 꼬리가 반짝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쁘니를 쓰다듬고 있던 그녀의 손에 그 반짝이는 꼬리가 닿았고 이내 빛은 사라졌다. 워낙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둘은 기분 탓으로 치부해 버렸다.

이내 여자의 권유에 손님도 쁘니의 머리에 손을 얹었고 쁘니는 기회를 보다가 이번에도 슬쩍 꼬리를 빛나게 한 후 손님에게도 그 빛을 스며들게 했다.

충분히 둘의 손길을 느낀 쁘니는 이내 슬쩍 거리를 두고 털을 고르다가 에미에게로 돌아왔다. 여자와 손님은 아쉬운 마음에 에미를 보다가 쁘니의 목줄을 그제야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람 손을 탄 개냥이구나. 주인은 계 탔네.


에미에게 돌아온 쁘니는 그녀의 옆에 앉아 작게 속삭였다. 야양. 에미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달라진 게 있어? 뭘 조금 지켜봐. 에미가 속삭이는 사이 쁘니는 앞발로 그녀를 툭 쳐서 시선을 돌리게 했다. 다시 여자와 손님을 바라보자 도저히 진전되지 않던 대화가 진전되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의 날씨에서 자신들이 느끼는 것을 이야기하고 또 그렇게 느끼게 된 과거의 이유들을 천천히 꺼내고 있었다.

급하지 않게. 상대가 놀라지 않게. 상대가 꺼릴만한 이야기를 빼내고서 아주 천천히, 조심스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에미가 놀라 쁘니를 바라보자 쁘니가 아주 작고 길게 울었다. 그리고 살짝 코를 치켜들었다. 아주 조금 솔직해질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방법을 배우다니, 그럼 최면빔 같은 거야?

말 같지도 않은 에미의 말에 쁘니는 벤치 등받이로 올라서 냥냥펀치를 몇 대 날렸다. 자신의 내면에 용기를 북돋아주는 힘이 최면빔이라니.

쁘니는 다시 한번 진심으로 이 예쁘지만 한없이 가벼운 소녀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없었으면 넌 어쩔 뻔했냐. 그 의미를 담은 울음소리에 에미는 발끈했지만 차마 쁘니와 드잡이질을 할 수가 없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중에 둘이 시선을 끌어버리면 이야기가 멈춰버릴 수도 있으니. 대신 다음을 기약할 뿐이었다. 너 나중에 두고 봐.


잘 진행되던 이야기는 어느 순간 손님이 이야기를 망설이면서 다시 방황하기 시작했다. 속마음을 꺼내 놓는 것을 꺼리는 것이 여실히 보이는 장면.

원래라면 여기에서 둘의 대화는 끝이 나고 관계 역시 더 진전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아주 조금의 용기는 서로를 조금 더 기다려줄 수 있는 마음을 주었다.

긴 침묵과 살랑이는 바람과 따뜻한 볕 사이에서 손님은 드디어 조금 더 입을 열 결심을 했다.


“언제부터인가 실패가 너무 당연해졌어. 그걸 받아들이는 것도 너무 쉬워졌지. 시작하면서도 이미 실패할 것들을 예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날들이 많아졌지. 기대하면 그만큼 실망도 커지니까.

실패가 많아지는 건 그냥 어른이 되고 있는 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지만 자꾸만 내 탓이 아니라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을 탓하는 날들이 많아지더라. 그렇게 말할 때면 점점 더 나는 작아지는 것만 같았어.

그래서 하루 동안 얻은 감정과 스트레스를 모두 그날에 버리고 다음날을 살아봤어. 괜찮더라. 오늘 만난 괜찮은 사람도, 어차피 한번 보고 말 사람이니 기대를 오늘에만 두고, 그렇게 사는 거지.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건 발전이 없다는 말도 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는 거니까. 그런데 가끔은 그런 게 잘 안 되는 사람이 있어. 오늘의 감정을 함께 내일로 끌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어.

그럴 때마다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힘들다기 보단 설레어서 조금 혼란스럽네. 이런 감정이 너무 오랜만이라, 또 너무 좋아서.”


둘은 또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손님의 말은 솔직했고 담담했으며 답답했다. 에미는 어쩌면 여자가 안녕을 고하고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쁘니가 말한 조금의 용기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여자는 괜히 자신의 소맷자락을 문지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살짝 발을 바닥에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이번 결혼식은 최악이었어. 사람은 와글거렸고 신랑과는 스치듯이 인사했지. 친한 애들은 거의 없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친했던 애들이 이젠 친하지 않아 진 거겠지.

기억과는 다르더라. 언제부터 그렇게 여자취급을 했다고. 난 굳이 얘들하고 남녀 관계를 설정할 생각이 없는데 은근히 접근하는 것도 싫더라. 차라리 선을 긋고 있는 네가 편했어. 그게 관심이 될 줄은 나도 몰랐지만 말이야.


네 이야기를 듣고 솔직히 조금 설레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조심스럽고 걱정도 많고 속 이야기 한마디 듣기가 힘든 사람이지만 그래도 아무 소리나 내뱉지는 않으니까.

실망? 당연히 실망하겠지. 내 마음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평생을 같이 산 엄마랑도 마음이 안 맞을 때가 더 많은데.

근데 그게 뭐 어때서. 매일 얻어맞고 매일 실망하면서, 매일 포기하고 체념하고 한숨 쉬면서, 하루하루를 다 놓아버리고 그중에 좋았던 기억만 쥐고서 다시 내일로 가는 게 우리가 사는 방식인걸.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실패를 잘하는 법을 배우는 것일지도 몰라. 오늘의 실패를 잘 수습해서 내일은 아주 조금 덜 실패하고 덜 실망하는 것을 배우는 거지.

실패에 무뎌지거나 외면하는 게 아니라 마주하는 법을 배우는 거, 그게 어른이 되는 방법일 거야.”


말이 멈추고 그 사이에 바람 소리가 몇 번이나 들리고 나서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우리 까짓 거 한 번 설레여…”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손님이 그녀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님을 바라보았다.

손님은 귀가 벌게진 상태로 살짝 심호흡을 했다. 그러면서도 절대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정면을 바라본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정면에는 나무 서너 그루가 있었고 사람 하나 돌아다니지 않았지만 그는 완고하게 앞만 바라봤다. 그녀의 손을 꼭 쥔 상태로 그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오늘은 이게 내 최대치의 용기다. 더 이상 설레면 나 쓰러져.


살포시 웃은 그녀는 손을 고쳐 잡아서 잡힌 상태가 아니라 마주 잡은 상태로 만들었다. 그 꼼지락거리는 움직임만으로도 손님은 귀에서 볼까지 벌게졌다.

그녀는 그렇게 손을 잡은 상태로 앞을 보았다. 여전히 그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가 보는 곳에는 그저 나무 몇 그루, 그리고 바람과 햇볕, 그리고 공원, 저 멀리 하늘이 있을 뿐.

그래도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옆에서 들리는 작은 심호흡 소리와 설레는 마음을 감추려 하는 그 빨개진 볼이, 기분 좋게 느껴질 뿐.


오늘의 이 감정이 내일은 실망으로 바뀔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이 언젠가 추억으로 남을지라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란 것을. 이 행복을 최대한 누려야 한다는 것을.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수많은 실패 속에서 가끔 찾아오던 이 크나큰 행복을 놓치지 않고 즐기는 사람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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