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우정, 당신의 곁에 서있는

- 삶의 파도에도 서로를 붙잡고 견딜 수 있는 건

by 블랙스톤

무슨 바람이 불어서였는지 모른다. 이 상황이 실현된 것은.

그저 바다를 보고 싶다는 한마디의 술주정은 정신 차리고 보니 바다로 향하는 기차표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말렸어야 할 멍청한 녀석들은 내 좌석 옆자리에 기절하듯 쓰러져 있었고.

하여간에 멍청한 것들. 인생에 도움이 안 돼요.


용케도 표를 구해 온 것은 대단하지만 결승선을 통과한 마라토너가 쓰러지듯이, 목적을 달성하고 아무런 미련 없이 좌석에 허물어져서 코를 골아대는 녀석들은 굉장히 창피했다.

몸부림치다가 아무렇게나 뻗은 녀석들의 다리를 대충 툭툭 쳐서 좌석 안에 잘 구겨 넣고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원도로 향하는 새벽 기차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다. 부끄러움에 이어 죄송스러움이 따라 올 일은 없을 테니까.


좌석 사이를 지나 화장실로 향하면서 창 밖의 풍경과 기차 안의 모습을 왠지 어디서 본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느낌. 이게 데자뷔인가? 혹은 아까 꿈에서 본, 바에서 떠들던 내 모습이 현실인 건가?


아직도 술이 덜 깨서 어디가 어디인지 잘 분간이 되질 않는다. 하지만 이내 지금 기차 안에 있는 나를 현실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십 년 안에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니, 그러기엔 너무 정정하시고 너무 젊다. 그리고 애초에 그런 사건 자체를 내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가볍게 세수를 하고 거울을 마주 보았다. 노랗게 염색한 머리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제 곧 빡빡 밀어야 할 머리. 첫사랑에게 차이고 홧김에 신청한 자원입대였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친구들 앞에서는 어차피 한 번은 가야 할 거 가면 되지!라고 당당하게 외쳤지만 사실 피할 수 있는 만큼 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피한다고 피해지는 게 아니니까 어쩔 수 없이 가는 거지.

혹시나 내가 군대에 간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 아이가 한 번쯤 돌아봐주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긴 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런 답답한 상황이기에 취해서는 바다가 보고 싶다고 말한 모양이다. 그냥 답답한 상황에 대한 넋두리일 뿐이었는데. 저 멍청이들은 그걸 곧이곧대로 듣고 연애를 도와주진 못하니 바다를 보는 건 도와주겠다며 취한 나를 충동질해서 기차에 탄 거고.

이제야 술이 좀 깨는지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이 되고 있다. 당장 오늘 수업은 빼먹을 상황이 됐다.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릴 수는 없으니 가장 가까운 역에 내려 돌아가야 할 텐데 어두컴컴한 바깥에는 산과 나무가 가득한 걸 보니 서울은 진작에 벗어난 모양이다. 지금 되돌아갈 차편이 있을까?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에라 모르겠다 싶은 마음도 든다.


산과 나무만 보이는 바깥 풍경으로 봐서 왠지 가까운 역에 가려면 한참은 가야 할 것 같으니 일단 조금만 더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 봐야겠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 녀석들의 맞은편 빈자리에 앉았다.

다리를 앞쪽에 쭉 뻗고 나니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게 바로 잠들 수 있을 것만 같다.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머리가 조금 더 개운해지면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아주 조금만 더 자자.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여기가 도대체 어디냐.”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도대체 어디 기차표를 끊은 거야?”

“분명히 정동진이라고 했는데 티브이에서 보던 거랑 너무 다른데?”

“일단 다른 건 다 둘째치고 춥다. 어떤 놈이 한겨울에 새벽 기차를 끊은 거냐.”

“배고프고, 갈 곳 없고, 춥고, 딱 그지네 이거.”


잠들었던 우리가 정동진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4시 반경. 해가 뜨기는커녕 주변이 전부 어두운데 파도 소리만 들리는 곳에 덩그러니 내려졌다.

내리자마자 우리 셋은 서로에게 비난의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고요한 새벽에 시끄럽게 떠들었다고 바다가 타박을 하듯이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 날아들었다. 마치 뺨을 마구 치는 듯한 바닷바람에 더 싸우지도 못하고 일단 근처의 편의점에 들러 따뜻한 음료를 샀다.


따뜻한 음료를 얼얼한 볼에 비비는 녀석들을 바라보자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날짜라도 조금 늦춰서 기차를 탔다면 새해 일출이라도 보러 왔다고 하지 어설프게 12월 중순에 일출을 보러 오는 건 또 뭐란 말인가.

뭘 해도 어설프고 뒤가 없는 녀석들이란 생각에 헛웃음이 나온다. 한편으로는 아무 생각 없이 일단 저지르는 녀석들이기에 꿍꿍이가 없다는 점에서 괜히 마음이 편해지기도 한다.


뜨거운 음료를 마시고 근처의 피시방으로 향했다가 가격을 듣고 놀라서 바로 나왔다. 아무리 관광지라지만 한 시간에 삼천 원씩 주고 피시방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 티격대면서 걷다가 역사 바깥 벽에 바짝 붙으면 바람이 덜 들이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셋이 역사 바깥 벽에 바짝 붙어 가만히 바닷바람과 파도 소리를 들으며 서 있었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쓴 녀석들이 담배에 불을 붙이겠다고 웅크린 채로 벽에 바짝 붙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부비부비를 하는 모양새처럼 보인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서울에서 어차피 갈 군대 후딱 해치우고 오겠다고 하던 나와 헤어진 여자는 잊으라고 하던 녀석들이 정동진 역사 벽에 붙어 부비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모습과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한참이나 웃었다.

녀석들은 처음엔 어리둥절해하다가 내가 손가락질을 하자 자신들의 몰골을 보고 같이 웃어댔다. 한참을 웃는데 또 슬쩍 끼어든 바람이 냅다 달려와 우리의 뺨을 쳤다.

일단 바람이 매섭고 추우니 군대고 여자고 간에 어디론가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우리는 잔뜩 웅크린 채로 근처 도로를 따라 걸었다. 저 멀리 산 위에 있는 배가 호텔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등록금에 보태겠다고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하느라 바쁜 대학생들이 호텔에 묵을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있던 돈도 술 먹고 기차까지 타느라 거의 다 털어버린 판이었다.

다행히 도로를 따라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민박집을 발견했다. 심지어 운이 좋게도 담배를 피우던 사장님을 만나 사정한 탓에 손쉽게, 게다가 비수기라고 싸게 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방에 들어와 앉고 보니 다시 한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평소 같으면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을 시간에 이게 무슨 일이람.


친구들은 내가 군대 간다고 설쳐대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며 삿대질을 시작했다. 녀석들의 손가락을 꺾다가 내 팔이 꺾여 제압당한 상태에서 내가 물었다. 그런데 배고프지 않냐?

녀석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한 끼를 때울 겸 모였다가 시작한 반주였다. 가벼운 반주에서 학교 앞 포차가 이차가 되고 기차가 되더니 정동진에서 아침을 삼차로 먹게 생겼다.

이 기막힌 현실에 나와 친구들은 헤죽거리다가 이내 정신을 다잡고 손을 내밀었다. 가위바위보.

이긴 나와 친구 하나가 얼싸안고 웃는다. 진 녀석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이 시간에 음식을 어디서 공수하냐. 편의점 도시락도 다 나갔던데.

우린 바닥에 누우며 말했다. 그건 우린 모르겠으니 얼큰한 국물도 하나 챙겨 와라.


야간 기차표 때도 그랬지만 묘하게 능력이 좋은 녀석들이다.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간 녀석을 뒤로하고 우리는 따뜻한 방안에 늘어져 있었는데 투덜대던 놈이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뭔가를 한 보따리 들고 돌아왔다.

뭔가 싶어 얼른 풀어보니 중국음식과 치킨.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앞에서 우쭐거리며 놈이 말했다. 민박집에는 보통 전단지나 배달스티커가 있기 마련이지.


얼른 시간을 확인하니 아침 여섯 시가 되어가는 시간. 한겨울이라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어두컴컴한 창밖을 한 번 바라보고 녀석을 향해 말했다. 도심도 아니고 관광지 해변가에 24시간 하는 집이 있다고?

우리끼리 쑥덕거리자 녀석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아까 들렀던 편의점에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다행히 마감하려는 가게 번호를 받아냈다고.

이따 점심은 민박집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있는 백반집에 가면 될 것 같다고. 새삼 느끼지만 도대체가 이상한 곳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놈들이었다.


분명히 아침을 먹으려고 했는데 짜장면에 짬뽕에 치킨까지 있으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편의점에 들러 이것저것 물어보고 답변을 들으면서 그냥 올 수가 없었다며 녀석이 꺼낸 음료와 술을 보고는 더 그랬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눈을 마주치고는 소주병을 잡았다. 물론 타박 또한 같이 시작되었다. 다른 건 다 사 오면서 잔을 안 사 오는 건 무슨 심보인데. 도대체가 도움이 안 된다. 머리에 들어있는 건 무게추냐, 아니면 우동사리냐.

내가 해가 뜨기도 전에 아침술을 먹게 될 줄은 몰랐다. 해장술은 잔으로 조심해서라도 먹을 수 있지 해뜨기도 전에 병나발이라니. 고맙다. 덕분에 진귀한 경험을 다 하네.

평생에 한 번만 있어야 할 경험일 것 같긴 한데. 여자한테 차였다고 정동진까지 와서 병나발을 다 불어보다니. 친구 덕에 할 건 다 해보네.


기울이는 술병을 따라 취기가 오르고 잔소리가 늘어나자 녀석은 단호하게 말했다. 먹고 말해. 일단은 먹고 보자. 짠!

잠시 눈을 마주친 우리는 같이 술병을 들어 올렸다. 짠.

취기가 오르면서 아까 기차에서 느꼈던 마음이 다시 올라온다. 에라 모르겠다. 녀석 말대로 일단은 소주병을 들었으니 일단 마시고, 배도 고프고 술 덕에 입도 쓰니 좀 먹고 생각하자. 짠!


술병을 부딪히는 소리는 경쾌했고 우리가 떠드는 소리를 싫어하던 바닷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으며, 따뜻한 방 안에서 멍청한 녀석들과 낄낄대는 시간은 즐거웠다.

슬쩍 밝아지는 하늘마저 우스웠다. 결국 한마디가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뭐 이런 날이 다 있냐.

내 말에 다른 녀석들도 맞장구를 치며 낄낄댔다. 뭐가 그리 웃긴 건지 배를 붙잡고 넘어가고, 뒹굴면서 웃어댔다. 그러다가 다시 술병을 집어 들었다. 유난히 술이 달게만 느껴졌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