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우정, 당신의 곁에 서있는(2)

- 삶의 파도에도 서로를 붙잡고 견딜 수 있는 건

by 블랙스톤

술이 달았던 덕이었는지 신나게 아침을 즐긴 우리는 점심때에나 깨어났다. 엄밀히 말하자면 민박집 아저씨의 목소리에 일어났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

퇴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아저씨에게 감사하다고 죄송하다고 말한 후 우리는 회의를 시작했다. 사실 회의랄 것도 없었다.

십 초도 이어지지 않은 회의 내용은 이랬다. 움직일 수 있겠냐? 살아있는 게 용하다. 난 도저히 못 움직여. 하루 더 묵자. 안 되겠다.


이렇게 또 하루치의 수업이 F를 향해 달려 나가게 된 와중에도 우리는 히죽거렸다. 그래도 알바는 주말에 해서 다행이다. 대학은 한두 번 결석까지 봐주지만 알바는 결석을 안 봐주잖아. 그러게. 그러네.

대책 없이 긍정적인 멍청이들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 다행인 건 다행인거지.


기차표를 구하고 아침을 공수해 왔던 녀석은 우리에게 좋은 알바자리가 있다며 주말알바를 권했었다. 조금 빡센 대신에 시간은 짧고 시급은 세며 너무 더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뭔가 싶어서 따라갔던 일은 뷔페 설거지 아르바이트.

시급도 높고 까짓 설거지가 많이 나와봐야 입이나 털면서 하다 보면 금방 할 수 있지!라고 생각했던 것은 시작 십 분 만에 산더미처럼 쌓이는 접시와 그릇을 보면서 원망으로 바뀌었다.

입을 털 시간에 뭐 하나라도 더 문질러서 기름기를 닦아내야 했다.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이고 땀을 뚝뚝 흘리며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끝내면 그 옆으로 이호, 삼호의 산더미가 생기곤 했다.

손가락이 퉁퉁 불고 하도 문질러서 손끝을 넘어 팔이 떨리기 시작할 때쯤 허리에는 이미 감각이 없을 정도였다.


일이 끝나고 핏발 선 눈으로 일을 주선한 놈을 붙잡아 잡도리를 시작할 때쯤, 뷔페 사장님이 다가왔다.

원래 설거지는 그만두는 사람이 많아 곤란했는데 처음 왔던 친구가 잘 버티고 또 잘해줘서 친구들을 데려오라고 했더니 역시 친구는 끼리끼리라고 다들 성실하게 해 줬다고.

대충대충 하지 않고 빠득빠득 문지르고 빠릿빠릿하게 해 줘서 고맙다며 하루 일당과 함께 음식 몇 가지를 싸주셨다.


음식 봉다리를 달랑거리며 건물 옆의 으슥한 곳에 앉아서 우리는 말이 없었다. 뭔가 묘한 기분이었다. 보통은 고생했다, 잘했다 정도로 끝나는 게 원래 알바라는 것인데 고맙다며 뭔가를 더 챙겨주는 사장님이라니.

사장님이 좋은 사람이구나 싶으면서도 뭔가 인정받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허리가 뻐근한 것도 괜찮은 것만 같았다. 사실 일당을 바로 챙겨주셔서 눈앞에 봉투가 보이니 괜히 미소가 지어지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잡도리도 잊고 잠시 멍하니 있자니 멍청이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이걸 한 달이나 했다고? 너 대단한데?

칭찬을 들은 녀석이 어깨를 우쭐대며 말했다. 나랑 같이 한 사람들은 다 도망갔어. 사장님이 성실한 알바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한탄하시길래 내가 쓸만한 머슴들을 잡아오겠다고 말했지.

사장님이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우리가 다 같이 세 달만 버티면 시급도 조금 더 올려주신대. 어때? 죽이지?


나는 함께 도매금으로 머슴이 된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녀석은 나와 같은 마음인지 의미심장하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갑자기 일어나 다가가자 일을 주선한 녀석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내가 말했다. 니 말대로 진짜 이 일 죽인다. 그러니까 너도 죽인다. 잡아. 뒤져. 이 새끼야. 친구를 팔아?


그날의 뒤풀이가 끝나고 세 달이 훌쩍 넘어 반년 가까이 지났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말에 일을 해왔고 사장님은 여전히 집에 갈 때면 우리에게 음식을 싸주셨다.

처음 한두 번은 우리끼리 먹어치우기도 했지만 이내 집으로 가져가는 게 어머니의 잔소리를 막는 좋은 방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뷔페에서 가져오는 음식은 대부분 집에서 하기에는 어려운 것들이 많아서 엄마들이 반기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다시 한번 사장님을 찬양하며 당당하게 집에 들어가 음식을 넣어두고 따로 모여 술을 마시곤 했다.

그렇게 술을 마시는 날이면 상황이 역전되어 주선자 녀석이 우쭐대며 외쳤다. 거봐. 이 일 죽인다고 했잖아.


인정할 건 인정하는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죽여. 시급도 많고, 설거지도 많고, 다른 일거리도 많고, 쉴 시간은 없고. 손은 퉁퉁 붓고 허리는 끊어지고 그럴 때마다 너를 죽이고 싶고. 그런데 사장님이 진짜 좋아.

사실 사장님 때문에 계속 다닌다. 넌 사장님 덕분에 산 줄 알아라.


전에 만났던 사장님들은 그리 좋은 기억을 주지 않았는데 요즘에 만나는 사장님들은 꽤 좋은 기분을 안겨주신다.

민박집 사장님은 하루 더 묵겠다는 우리의 버석거리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시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우리에게 찌개를 덜어주셨다.

방으로 돌아와 찌개를 담아 온 냄비를 열어보니 얼큰한 콩나물해장국이었다. 다행히 새벽에 사 온 물건 중에 햇반이 있었다.

사온 녀석이 오히려 놀라는 것을 보니 아무거나 주워 담았다가 얼결에 대박을 건진 느낌이었다. 국을 데워서 입 안에 한 수저 떠 넣고 나니 뱃속이 짜릿한 것이 이제야 조금 살 것만 같은 느낌이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지 다른 녀석들의 멍하던 눈에도 조금씩 초점이 돌아왔다. 정신없이 콩나물해장국에 밥을 말아먹은 후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상을 한쪽으로 밀고 다 같이 이불에 쓰러졌다.

일단은 좀 자고 일어나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도 어제가 끝나지 않은 기분. 우리의 오늘은 여전히 시작되지 않았다.


다시 깨어난 시간은 해가 넘어가려고 슬슬 자세를 잡는 시간이었다. 오후 늦게에나 일어나 우리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현실을 자각하며 오늘을 시작했다. 망했네. 망했다. 망했구나.

각기 다른 세 목소리가 같은 의미의 말을 한다. 이제야 어제가 끝나고 오늘이 시작됐기에 당연하게 수습도 같이 시작됐다.

각자 집에 전화를 해 욕이든 핀잔이든 잔소리든 쓴소리를 들은 후에 한 명씩 돌아가며 씻었다. 망했는데 나름 나쁘지 않네.

먼저 씻고 방 한쪽에 기대 티브이를 보던 녀석이 말했다. 두 번째로 씻고 나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사랑과의 이별로 머리가 꽉 막힌 느낌이었는데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는 동안 그녀 생각보다도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을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이별은 당연하게 생각했던 내 것이, 사실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었다. 매일 돌아보고 후회하고 그때 그랬다면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굴레였다. 계속되는 도돌이표.

도저히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을 것만 같아서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고 답답하기만 했는데.

어제의, 그 멍청하고 우당탕한 하루를 보내는 동안은 오롯하게 이 멍청한 놈들과의 하루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는 하루를 보내고 나니 이제야 뭔가 숨이 좀 트이는 것만 같았다.


처음엔 암담하게만 느껴졌던 짧은 머리는 손으로 툭 치기만 해도 물기가 없어져서 나름 나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씻으러 들어갔던 녀석이 나왔을 때도 첫 번째로 씻은 녀석의 머리에 물기가 남아있는 것을 보니 더 기분이 괜찮아졌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젖어있는 녀석들의 머리를 보니 추운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평소라면 남자놈들끼리 뭐 하는 짓이야?라고 할만한 말을 녀석들에게 던졌다. 온 김에 일몰이나 같이 보러 가자.


머리가 덜 말라서인지 유난히도 덜덜 떠는 녀석들은 웬일인지 별 불만 없이 방을 나섰다.

녀석들의 반발을 예상하고 있던 내게는 뭔가 김 빠지는 일이었지만 순순히 길을 나선 녀석들이 추위에 떠는 것도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해변가를 향해 걷던 중 한 녀석이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야! 동해에서도 일몰이 보이냐?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녀석들은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느라 말이 없었고 나는 갑자기 머리가 멍해져서 말이 없었다.

언제까지고 녀석들의 눈초리를 이겨낼 순 없었기에 나는 겨우 대답했다. 아주 멍청하게. 그러네?

녀석들은 순간적으로 내게 한걸음 다가섰고 나는 재빠르게 물러서며 말했다. 일단 바다잖아. 바다나 보러 가자. 파도 소리도 듣고 해변가도 걷고.


잠시 한숨을 내쉬는 것만 같았지만 녀석들은 별말 없이 해변을 향해 걸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게 말을 걸지만 않고 연신 투덜대고 있었다.

이게 들으라는 듯이 혼잣말로 투덜대고 있는 거라 내가 뭐라고 하기도 좀 어려웠다. 그렇게 혼잣말을 빙자한 앞담화를 들으며 해변가에 도착했을 때, 녀석들의 구시렁거림이 멈췄다.

조용해진 녀석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와, 하는 소리를 흘리며 입을 다물 생각조차 못하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주황빛의 노을. 왼쪽의 산으로 넘어가는 해를 따라 긴 망토처럼 주황빛의 노을이 펼쳐져있고 그 노을 망토를 장식하듯이 하얀 구름이 펄럭이고 있었다.

노을에 가까울수록 노란빛을 띄는 그 흰 구름들을 지나면 파란 하늘이 하얀 구름을 펄럭이며 노을을 배웅하고 있었다.

노을에 가까울수록 연한 하늘색 하늘이어서 마치 손이 하얗게 되도록 힘을 줘서 붙잡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선명한 색의 대비를 보는 순간 왜 하늘색이 파란색과 구별되며 더 하늘하늘한 느낌을 가지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하늘에 물든 색들이 전하는 감정들까지도.


우리는 한참이나 가만히 서서 하늘을 보다가 이내 옆쪽에 있던 모래 둔덕에 올랐다. 해가 산 너머로 사라지기 전에, 하늘에 펄럭이는 저 예쁜 노을 망토를 조금만 더 눈에 담고 싶은 마음이었다.

모래 둔덕에 서서 해가 산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본 후에야 우리는 바닷바람과 파도소리가 우리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정도로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한 녀석이 말했다. 술이 덜 깨서 하늘이 이렇게 이쁜 거냐. 아니면 그냥 원래 하늘이 이뻤는데 우리가 몰랐던 거냐.


나와 다른 녀석은 멍청이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해가 산을 넘어가고 나니 오히려 더 불타오르는 것처럼 색이 진한 빛이 하늘을 물들여 갔기 때문이었다.

마치 한줄기 유성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처럼, 더 진해진 주황색이 보랏빛을 띄면서 펄럭이던 하늘 망토에 한줄기 선을 긋고 있는 듯한 그림. 입을 열었던 멍청이조차도 다시 입을 헤 벌리고 그 하늘을 바라보았다.


“좋다. 덕분에 이렇게 좋은 것도 보네. 니들 아니었으면 이런 것도 몰랐을 거 아냐. 고맙다. 이것저것 다. 고마워.”


아마도 그 아름다움에 취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고 녀석들은 아까의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애써 그 시선들을 외면하며 하늘을 보았다. 파란 하늘은 이제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고 그에 대비해 해가 넘어간 산 근처의 하늘이 붉어지고 있었다.

마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만 같은 그 모습은 노을을 배웅하던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고 슬쩍 등을 돌리며 눈물을 흘리는 것만 같았다.

이런 풍광을 내 인생에 단 한 번이라도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니, 이런 하늘을 보며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싶었던 하루.


나는 그 하늘을 다시 본 덕에 알 수 있었다. 그래. 저 녀석이 만 원이고 이 녀석이 만삼천 원이었지.

그토록 건강하고 밝던 아버지는 오늘로부터 십 년도 채 가지 않아 쓰러지신다.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면서도 다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만 원과 만삼천 원. 둘이 합쳐 이만삼천 원이 될 녀석들은 이후로도 내 곁에 서 있을 것이다. 창피하고 쑥스럽고 멍청하고 부끄러운 모습들을 계속 보여주고,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계속 투덜거리면서도 내 곁에 서 있을 것이다.

이토록 생생하고 이토록 손에 잡힐듯한 감정이 턱끝까지 차오르지만, 그래도 이건 꿈이다. 지나간 과거다. 그래도 이토록 선명하기에 나는 과거에는 하지 않았던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꺼내놓을 수 있었다.


“내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나, 알아. 그냥. 그냥. 고맙다고. 지금도. 변함없이 옆에 서 있어 주는 게 얼마나 고맙다고.

나도 똑같이 해줄 거라서 그런 거라고 말할 걸 알지만 그냥 말하고 싶었다. 아버지에게도 알면서도 말하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그런지 꼭 한 번은 말해주고 싶었어. 그냥. 그렇다고. 고맙다고. 곁에 있어줘서.”


아무리 꿈이라도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부터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더 길게 마음을 툭툭 던질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고장 난 목각인형 같은 녀석들은 턱을 떨어뜨리고 나를 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저렇게 놀란 표정도 똑같이 멍청하게 보이는지.


“그러니까 적당히 멍청한 짓 하면서 같이 가자. 혼자 하면 미친 짓이지만 같이 하면 그냥 멍청이들에서 끝날 거 아냐. 사실 원래 멍청이라서 그런 거지만.”


뭐래! 제일 멍청한 놈이! 그래! 어제는 여자한테 차이고 질질 짜던 놈이 갑자기 미쳤나 멋있는 척하고 지랄이야!

어? 너 또 우는 거 아니지? 왜, 하늘이 너무 이뻐서 여친 생각나냐? 아니면 저 어두워지는 하늘이 곧 입대할 니 미래 같아서 그런 거 아니야?


… 세상에는 구제불능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그 말은 이 녀석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팔을 걷어붙였다.

꿈이고 자시고, 과거의 좋은 기억이고 자시고, 니들은 오늘 내 손에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알겠냐? 이 시부랄 잡것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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