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그리고 당신의 곁에는

- 삶의 파도에도 언제나, 항상, 늘 그랬듯이

by 블랙스톤

에미는 창문을 열었다. 이만삼천 원을 친구로 둔 사내의 꿈에서 보았던 그 바닷가와 짙고도 아련한 노을이 펼쳐진다. 손끝이 저릿할 정도로 아련한 그 풍광을 에미는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문득 오래간만에 창을 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쁘니가 오기 전에는 영업이 끝나고 나면 가끔 창문을 열어 손님들이 보여주었던 꿈의 여운을 즐기곤 했었다.


‘이바구’는 화자(話者)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는 곳. 그들이 보고 느낀 것을 함께 느낄 수 있었기에 그들의 이야기에서 아름답고 좋았던 것만을 뽑아 몇 번이고 다시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환상적이고 놀라운 일이었지만 대개 개인의 경험은 그 당시의 상황이 뒷받침이 되어 추억으로 채색되기 때문에 그때의 상황이라는 밑그림이 없는 에미로서는 한두 번 그들의 명화를 엿보고 나면 시들해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아주 가끔 이렇게 그림만으로도 사람을 멍해지게 하는 풍광이 있을 때면 에미는 창 너머로 그것을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다.

그들이 느꼈던 감정을 되살려보면서, 그들의 입장으로, 그때의 풍광을 본다. 그 압도적인 추억의 아름다움을 곱씹으며 엿본다.

그리고 창을 닫을 때면 왠지 모를 한숨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럴 때면 괜히 힘주어 콧노래를 부르며 청소가 끝난 주방을 둘러보고 아끼는 식기를 다시 한번 닦고는 했다.


이만삼천 원 사내의 풍광을 바라보던 에미는 턱을 괴고 있는 자신의 팔에 와서 머리를 부딪히는 쁘니를 느꼈다.

쁘니는 말없이 몇 번이나 머리와 등을 에미의 팔에 부딪히고 문댄 이후에 슬쩍 기대어 누웠다. 그리고 에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냥냥.

에미는 당당한 쁘니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알았어. 만질게.


에미는 쁘니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때로는 마사지를 하듯이 가슴과 등을 만지고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눈이 뒤집어져라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엉덩이 팡팡을 해주기도 하고 그대로 쓸어내려 하늘거리는 꼬리를 만져보기도 했다. 쁘니는 누워서 그르렁거리다가 눈을 감고 가만히 골골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일정한 리듬으로 들리는 그 골골송의 박자에 맞춰 에미는 연신 쁘니를 만져주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풍광에 가끔 눈을 빼앗겨 손이 멈추면 쁘니는 누운 상태로 얼굴만 획 돌려서는 에미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냥냥.


울음소리에 놀라 아래를 바라보면 정색을 하는 쁘니의 시선에 에미는 어쩔 수 없이 멈춘 손을 다시 가동해야 했다. 해가 완전히 저물어서 어두워질 때까지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아름다웠던 풍광을 제대로 즐기기도 못했지만 에미는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손 끝에 닿는 부드러운 온기와 오르락내리락하는 쁘니의 배와 가슴이 에미에게 왠지 모를 안도감을 주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어 창을 열었지만 막상 닫을 때의 적막함은 살짝 부담이었다. 하지만 골골송을 부르며 곁에서 온기를 나눠주는 쁘니 덕에 그 걱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완전히 어두워져 파도 소리만 들리는 창을 닫고 에미는 탁자에 옆으로 엎드려서 쁘니와 눈을 마주쳤다.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는 쁘니를 마주 보며 에미도 아주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눈짓을 보내고 나서 에미가 탁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에 따라 쁘니도 몸을 일으키고는 길게 기지개를 켜고 크게 하품을 한 후에 에미에게 말했다. 이야아오옹.


그 말에 살짝 당황한 에미가 쁘니를 바라보았다. 어떤 의미로 쳐다보는지 알 텐데도 쁘니는 눈을 피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에미가 쁘니의 눈을 피하고 말았다.

얼른 뻣뻣하게 일어나서 못 들은 척하고 다른 곳으로 걸어가려는데 다시 한번 쁘니가 길게 말하며 에미를 재촉했다. 이야아오옹.

도망치듯 걸음을 서두르는 에미를 따라오면서까지 쁘니가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말을 반복했다.

에미는 그 재촉에 이기지 못하고 삐걱거리는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았어. 마스터 서재에 가보자는 거지? 혼나도 난 몰라.


마스터의 서재는 이층에 있었다. 주거공간인 이층에는 이제는 쁘니와 함께 하는 에미의 방이 왼편에 있고 오른편에 마스터의 방, 그리고 그 가운데에 서재가 있었다.

요즘, 그러니까 쁘니가 오기 전, 일이 년 사이에 에미가 마스터의 방이나 서재에 들어갔던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렸을 때는 그저 떠들고 싶다는 마음에 마스터의 곁에서 몇 시간이고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조금 더 커보니 떠들고 있으면 지긋이 바라만 보고 있는 마스터의 눈길이 조금 부담스러워졌기 때문이었다.

원래 평소에도 말이나 표정변화가 별로 없었기에 묵묵한 그 시선이 어떤 의도가 없는 호의라는 것을 알면서도 문득문득 부담스러울 때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시선을 받으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뭔가를 잘못 말한 것은 아닌가 괜스레 찔려서 잘 풀어나가던 이야기가 꼬이곤 했다.

그렇게 한 번 이야기가 꼬이고 나니 마스터에게 말을 할 때면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하곤 했다.

그러면 왠지 마스터와의 이야기를 꺼리게 되고, 말을 고르고, 말을 고르다 보면 가려야 하는 것들이 많아지고, 점점 말수를 줄일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서재의 문고리를 잡고 망설이는 에미를 대신해 쁘니는 서재의 문을 벅벅 긁었다. 에미가 화들짝 놀라거나 말거나 계속 문을 긁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서재는 그리 넓지 않았다. 양쪽 벽면 붙박이 책장에는 책이 가득했고 방 한가운데에 하나의 책장이 덩그러니 서 있는 구조였다. 다만 천장이 없었다. 하늘을 향해 끝도 없이 책장이 솟아서 마치 탑처럼 보였다.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면 어느 정도 선에서 책장은 흐려지고 하늘이 보였다. 오늘은 별이 쏟아질 듯 빼곡하게 박힌 하늘이었다.

반달의 은은한 달빛은 서재의 바닥에 닿을 때면 환한 조명으로 바뀌어 책을 읽는 것에 전혀 무리가 없었다.

책장이 없는 정면의 벽에는 벽난로가 있었고 그 벽난로 옆쪽으로 안락의자에 앉은 마스터가 들고 있던 책을 내리고는 커다란 안경 너머로 가만히 에미와 쁘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자 에미는 머릿속이 엉키는 것을 느꼈다. 생각을 정리하지도 못하고 문을 연 게 실수인 것만 같았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하지. 쁘니 탓이라고 먼저 말할까. 심심해서 왔다고 하면 왠지 한소리 들을 것 같은데. 기분은 나쁘지 않으신 것 같기는 한데.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하지.

입을 살짝 벌린 채로 멈춰버린 에미를 바라보던 쁘니는 가만히 고개를 젓고 꼬리를 살랑이며 마스터에게 말했다. 이야아오옹.


마스터는 쁘니의 말에 둘을 번갈아보며 바라보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손을 튀기자 그들의 뒤에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안락의자가 생겨났다.

쁘니는 자신의 뒤에 생겨난 안락의자를 슬쩍 바라보고는 에미를 재촉했다. 에미는 쁘니의 재촉에 의자에 앉았고 쁘니는 그런 에미의 무릎으로 폴짝 뛰어올랐다.

다시 마스터가 손을 튀기자 둘을 태운 안락의자가 슬며시 벽난로 근처로 다가왔다.


쁘니는 꼬리를 살랑이며 에미를 툭툭 쳐서 자신을 만지도록 한 후에 마스터를 바라보며 고롱고롱 소리를 냈다.

마스터는 아래로 내리고 있던 책을 접어 옆의 협탁 위에 올렸다. 그리고 커다란 안경도 벗어서 협탁 위에 올렸다.

에미는 뭔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우물쭈물하며 손을 꼼지락 거렸다. 아, 그, 저. 다만 그것은 시도로만 끝나고 도저히 이야기를 시작하지는 못했다.

쁘니는 꼼지락 거리는 손을 머리로 툭툭 들이받으며 입 다물고 자신이나 쓰다듬으라는 의사를 전했다. 마스터는 그런 그들을 보며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쁘니와 함께 하기로 한 건 좋은 선택이었구나. 먼저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오다니.”


에미가 중간에 생략된 이야기의 맥락을 찾지 못해 머리를 갸우뚱거리는 사이 쁘니가 대신 대답했다. 이야아오옹.

에미에게 했던 말과 같은 울음소리. 마스터에게도 똑같은 말을 전하는 쁘니에게 마스터는 여전히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 태도가 뭔가 낯설어서, 무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마스터가 아니라서, 에미는 오히려 뭔가 불안함을 느꼈다. 그런 에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쁘니는 태연하게 꼬리로 에미를 툭툭 치며 말했다. 냥냥.

쁘니의 말에 에미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쁘니를 쓰다듬었다. 다만 반사적인 행동이었을 뿐 여전히 걱정을 담을 눈초리로 마스터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싶다니 어떤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이 서재에 가득 찬 사람들의 이야기를 원하는 건 아닐 테고. 그럼 에미가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해줄까?”


쁘니는 눈을 번쩍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에미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쁘니의 목덜미를 꽉 쥐었지만 눈이 뒤로 까뒤집어지는 중에도 쁘니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스터는 작게 웃음을 흘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미는 사고뭉치였지. 어찌나 호기심이 많고 가만히 있지를 못하던지 손님이 왔는데 바 테이블 위를 뛰어다닌 적도 있었단다.

덕분에 내게 많이 혼나고 ‘반성의 시간’을 가진 적도 많았어. 아, ‘반성의 시간’이 뭐냐고? 그건 일종의 둔갑술인데….”


마스터는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평소와는 다르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을 잘했다.

손님의 이야기를 듣고 또 손님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그저 그러려니 했지만 에미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마스터를 보고 있자니 뭔가 어색했다. 그리고 어색함은 잠시뿐이었다.

이야기는 점점 에미가 부끄럽게 생각하는 과거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사고를 치고 빗자루로 변신되어 벽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던 ‘반성의 시간’부터 시작한 이야기는 슬쩍 잘생긴 손님의 안주 옆에 ‘이바구’에 다시 방문할 수 있는 방법을 남겼던 시기를 지나 문 밖을 나가보고 싶다고 떼를 쓰던 시기까지 도달했다.


“그땐 어렸을 때잖아요!”


마스터의 이야기가 에미의 어린 시절로 향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조밀해지기 시작했다.

‘반성의 시간’을 설명할 때는 그저 그런 것이 있다 정도로 끝나던 이야기가 매력적인 손님에게 끌리던 어린 시절의 에미의 모습은 그때의 손짓 하나까지 그려냈다.

쁘니는 연신 웃으면서도 에미의 손이 멈출 때면 그르렁 거리며 손을 멈추지 말 것을 강요했다.

에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손을 멈출 수도 없기에 마스터의 입을 막지 못하는 상태라는 게 답답했는지 급기야 소리를 지르며 마스터의 말을 막았다.

쁘니는 그런 에미의 모습에 배를 잡고 누워서는 한참이나 웃었다. 마스터도 빙그레 웃으며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빨개진 에미가 멈춘 이야기에 조금 진정이 되자 마스터가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에미가 기겁하며 다시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이번에는 마치 손님의 이야기를 듣듯이 그 당시의 에미의 기억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아주 생생한 꿈처럼, 그때의 느낌과 생각과 지난 모든 사연까지도 느껴지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에미는 발작하며 소리를 질렀지만 마스터는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 꿈같은 이야기의 배경음으로 왠지 마스터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벽난로 때문인지 흥분한 에미 덕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후끈해진 공기 덕에, 창 밖으로 넘겨다보던 다른 이들의 풍광 이후로 찾아오던 적막함은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에미는 후끈해지는 공기를 뒤로 하고 악을 쓰며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고 그제야 이야기를 멈춘 마스터는 바닥을 구르는 에미를 웃으며 바라보았다.

마스터가 이야기를 멈추면서 펼쳐지던 꿈속의 공간이 사라지자 에미는 서재 바닥을 뒹굴게 되었다. 그럼에도 눈을 꼭 감고 악을 쓰느라 자신이 어디를 구르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런 에미의 모습을 보며 쁘니는 안락의자의 팔걸이에 누워서 배를 붙잡으며 웃어댔다. 마스터는 이 모든 소동을 시작한 쁘니에게 살짝 눈인사를 보냈다.

쁘니는 웃는 와중에도 마스터와 눈을 맞추고 천천히 감았다 뜨면서 작게 속삭였다. 야옹.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돌려서 딴청을 피우며 그루밍을 시작했다. 마스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쁘니가 속삭인 이야기를 가만히 입 안에 굴려보았다. 가족. 가족이라.


아직 바닥을 뒹구는 에미는 이제 소녀와 아가씨의 그 어디쯤까지 자랐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향하며 자신의 공간을 마련하고 때때로 마스터에게 기대지 않고 홀로 서려하는 듯했다.

그러한 모습이 기특하고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이 들곤 했다. 이러한 인간적인 감정을 느낀 것이 너무 오래간만이라 마스터로서도 그저 한 발 물러나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마스터와 달리 쁘니는 스스럼없이 에미에게 다가갔고 그녀의 시선을 돌려냈다. 그리하여 지금은 마스터와 에미의 시간까지도 돌려준 듯했다. 다시 한번 마스터는 쁘니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것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새삼스레 쁘니를 '이바구'에 받아들인 것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스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밝게 웃었고 쁘니는 겸연쩍어 슬쩍 고개를 돌리고 그루밍을 하고 에미는 여전히 바닥을 뒹굴며 소리를 지르는 어느 나른한 오후의 '이바구'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