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간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술잔을 넙죽넙죽 받아먹으면서도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사내에게 아버님은 지나가듯이 말했다.
겨우 세 번 만나고 결혼 운운하는 것은 아니라고. 몇 번 더 만나보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내 딸이 자네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자고.
사내는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인사를 한다고 고개를 숙이다가 상에 머리를 쿵 부딪혔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전혀 아프지가 않았다.
왠지 장모님의 한숨소리와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그는 그저 웃었다. 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몇 번의 만남이 더 이어지고 나서 그녀가 물었다. 무슨 생각으로 성급하게 무릎부터 꿇은 거냐고. 사내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저 빙그레 웃었다.
여전히 그녀는 고왔다. 그녀의 어떤 부분이 어떻게 아름다운 거냐고 묻는다면 수십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었지만 그녀가 왜 곱게 느껴지는지 묻는다면 딱 꼬집어서 이유를 말할 수 없었다.
그냥 그녀가 너무도 곱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를 놓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이유도 없이 그냥, 그냥 그녀가 너무도 소중하고 더할 나위 없이 가장 귀중한, 단 한 번의 기회인 것만 같았다.
미친 짓이라는 건 사내도 잘 알았지만 부모님을 처음 뵙는 자리에서 이 확신에 가까운 마음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녀는 겨우 세 번의 만남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내에게는 세 번으로 충분했다.
그녀라는 확신은 절박함이 되었고 그것이 그를 무릎 꿇게 했다.
그녀는 대답 없이 웃으며 빤히 자신의 눈을 바라보는 사내의 팔을 툭 쳤다. 사내는 괜스레 얼굴을 돌리며 딴청을 피우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그녀는 손을 빼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서 사내는 헤벌레 웃었다. 그런 사내의 바보 같은 표정에 그녀도 작게 웃어주었다.
사내의 대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헤벌쭉 웃는 저 얼굴만으로도 왠지 대답을 들은 것만 같았다.
몇 번의 만남은 일 년의 만남이 되었다. 그동안 사내가 막내 동생의 대학 등록금을 위해 준비했던 적금은 만기가 되었고, 일하던 생산라인의 팀장이 되었으며, 넷째가 결혼할 사람을 데리고 왔다.
부모님은 첫째가 만나는 사람이 있으니 이젠 순서대로 보내고 싶다고 했지만 사내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 데모나 하고 다니는 말괄량이를 데려간다는 사람이 있을 때 얼른 보내야 해. 나는 조금 더 늦어도 티도 안 나니 괜찮아요.
다음 날 만나 그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별 대답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그 모습에 왠지 사내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 답답함은 그녀의 태도로 인한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당연하게 느꼈던 자신의 삶이 그녀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내는 말했다. 넷째 보내고 우리도 결혼합시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말했다. 청혼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너무 멋이 없었다면 이번 건 못 들은 걸로 해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 나서 사내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멋대가리 없는 소리만 하네. 넷째 먼저 결혼시키자는 말을 하면서 청혼을 하는 정신머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건데요!
사내는 옆구리에 달라붙어 힘껏 꼬집으며 흘기는 그녀의 눈매가 여전히 고와서 허허 웃으며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웃음은 곧 비명이 되었다. 대수롭지 않게 행동하던 그녀였지만 막상 사내를 꼬집을 기회가 생기자 멍이 들 때까지 세게 꼬집었다.
멍이 든 옆구리를 보고 나서야 사내는 생각했다. 내가 혼날 짓을 하긴 했구나. 혼났다면 고쳐야지. 앞으로는 가족보다도 그녀가 우선이어야겠구나. 잘못했다면 인정하고 고쳐나가면 되는 거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넷째의 결혼 덕에 조금 더 시간이 걸렸지만 어쨌든 그 해가 가기 전에 날짜를 잡았다.
집안에서는 날이 풀리는 봄이나 따뜻한 초여름에 식을 올리길 원했지만 그녀는 생각이 달랐다. 기왕 할 거라면 한 살이라도 젊은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그녀가 우선이어야 한다는 사내의 결심은 우직한 고집으로 이어졌다. 그녀를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나이를 내세워서 집안 어른들을 설득했다.
어쨌든 삼십 후반의 신랑보다는 삼십 중반의 신랑이 낫지 않느냐고. 그녀의 아버님과 어머님은 왠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슬쩍 사내의 곁에 붙어서 옆구리를 꼬집었다.
사내는 옆구리에 달라붙은 그녀를 보며 느꼈다. 이번에도 뭔가 실수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야 그녀의 나이가 이제 이십 대 중반이 된다는 걸 떠올렸다.
사내는 벌떡 일어나서 어머님과 아버님께 큰절을 올렸다. 정말 열심히 살겠습니다. 걱정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어머님과 아버님은 웃어 보이셨지만 웃음의 끝에 한숨이 살짝 매달리는 것을 도저히 숨기지는 못하셨다. 사내는 일부러 더 환하게 웃었다.
과장되게 더 몸을 부풀리며 자신감을 표출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한숨을 떼어내 드리고 싶었다. 그런 사내를 보며 그녀는 슬쩍 손을 잡아주었다.
결혼식 날 사내가 다니는 공장에서는 눈길을 뚫고 버스를 세 대나 대절해서 직원 동료들을 보내주었다.
버스에서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을 보고 그녀의 아버님과 어머님이 놀라는 표정을 짓자 공장장이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사내가 낸 술값과 축의금들을 생각하면 회사에서 해외로 신혼여행을 보내줘야 할 판입니다.
아버님은 그저 웃었고 어머님은 넷째 때문에 결혼을 미뤄야 한다고 했을 때 했던 말을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쓸데없이 사람만 좋은 저 화상.
신혼여행은 제주도로 정했다. 그녀는 부곡 하와이나 경주도 언급했지만 사내는 완강했다. 해외여행은 제한적 허용이라 갈 수가 없으니 비행기를 타는 기분이라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처음 타 본 비행기와 제주의 풍광은 그녀를 소녀로 만들어 주었다.
사내의 곁에 앉아서 쉴 새 없이 자신이 본 것들을 이야기하고 느낀 것을 그려냈으며 꿈을 꾸듯이 노래했다. 때론 몸짓과 손짓으로 자신의 기분을 표현했으며 발을 통통 튀기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일상에서 벗어난 그녀는 요정 같았다. 사내마저 한없이 들뜨게 하여 함께 네버랜드로 모험을 떠나는 어린아이처럼 만들어 주었다.
신혼여행 내내 그들은 즉흥적으로 계획을 만들고 신기한 곳을 찾으면 한없이 머물렀으며 흥미로운 것을 찾아 떠다녔다.
사내는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즐거움에 때때로 볼을 꼬집어 보기도 했다.
내내 웃는 그녀를 보며 저 모습을 결혼 생활 내내 보며 살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저 웃음, 가족을 위해 꼭 지켜내야겠다고.
신혼집은 일부러 사내의 공장 근처에 마련했다. 생산라인의 팀장이라고 해도 교대근무에서 빠질 수가 없었다. 해서 야근을 하는 날이면 야식을 먹는 시간에 따로 빠져나와 집에 들르곤 했다.
집에 돌아오면 기다리던 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조곤조곤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곤 하품을 하다가 다시 일을 하기 위해 돌아가야 하는 사내에게 인사를 건네주었다.
사내는 졸린 눈으로 억지로 웅얼거리며 인사를 하는 그녀가 너무 귀여웠다. 하품을 하는 것마저도 고와 보였다. 야식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결혼 이후 잠이 늘어난 그녀의 모습이 안정감을 찾고 나서 잠이 늘은 것처럼 보였기에 괜히 뿌듯하기도 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그건 사내의 착각이었음이 밝혀졌다. 첫째는 허니문 베이비였다. 야식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던 것은 사내였는데 꾸벅꾸벅 졸던 그녀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사내는 그녀를 꼼짝도 못 하게 하고 싶어 했고 그녀는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고 싶어 했다.
변덕이 생겨서 어느 날은 웃다가 울기도 하고 울다가 웃기도 했다.
사내는 항상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들을 건네주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 가장 아름다운 임산부. 최고로 귀여운 여인. 현명한 부인.
그녀는 여전히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었지만 변덕과 우울이 찾아오는 모든 순간에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계속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들을 건네주었다.
어느 날 그녀는 비빔국수를 먹고 싶다고 했다. 야식 시간을 틈타 집으로 돌아온 사내는 바람을 쐬고 싶다는 그녀와 함께 단골 막걸리 집을 찾았다.
사장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비빔국수와 잔치국수, 그리고 골뱅이 소면을 시켰다. 그녀는 비빔국수를 조금 먹다가 골뱅이만 쏙쏙 빼먹고는 잔치국수를 국물까지 들이켰다.
그런 그녀의 옆에는 폭포 포스터가 하나 붙어있었는데 폭포의 수증기 때문에 무지개가 예쁘게 걸린 사진이었다.
사진의 오른쪽 귀퉁이에는 하와이 폭포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사내는 그녀가 남긴 골뱅이 소면을 집어 먹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요정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폭포네. 요정같이 예쁜 폭포니까 우리 예쁜 요정님이 다녀와야지. 아기 낳고 저기 꼭 한 번 다녀오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엄마와 가장 귀여운 아기 사진을 찍어줄게.”
그녀는 잔치국수 국물을 마시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입에 가득 머금은 국물을 꿀떡 삼키고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머금었다. 우리 아기 이쁘겠지?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말했다. 아빠 닮아서 다리 짧고 머리가 크면 어떻게 해!
사내는 침착하게 말했다. 당신이 다리가 길고 머리가 작아서 괜찮을 거야. 우리 아기는 좋은 것만 듣고 좋은 것만 보니까 우리의 가장 좋은 것만 가지고 태어날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을 한잔 마시더니 폭포를 돌아보았다. 예쁘다. 꼭 데려다줘. 우리 아기랑 같이.
사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가족은 함께 저 예쁜 하와이 폭포로 갈 거야. 내가 약속한다. 나 약속은 꼭 지키는 거 알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잡은 사내의 손을 이끌어서 배에 올려두었다.
아빠가 약속한대. 요정 같이 예쁜 폭포로 우릴 데려간다고. 우리 가족이 함께 가는 거야.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