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간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내는 뛰고 있었다. 이제 조금 주름이 잡힐 듯 말듯한 눈매를 가진 사내는 얼마 전 잘 다듬은 머리가 마구 흩날려 헝클어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중요한 날에만 입겠다고 사놓은 양복이, 어제 열심히 다리기도 한 그 양복이 구겨지고 무언가 튀어 올라도 신경 쓰지 않고 달렸다.
사내는 사실 억울했지만 별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달렸다. 어쩔 수 없는 것은 그저 넘겨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일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후회와 자책과 분노뿐이기에 털 수 있다면 털어내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몰두하는 것이 낫다는 걸, 그는 지금까지의 삶에서 체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힘껏 달렸다.
그렇게 달려 읍내의 약속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내부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단정하게 차려입은 아가씨가 내부에 있었다.
사내는 숨을 고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늦어서 죄송하다 말하고 이유를 붙이려는데 그녀의 입이 먼저 열렸다.
“우리는 처음 보는 사이랍니다. 처음 하는 약속이었고요. 게다가 선은 어른들과 함께 한 큰 약속인데요. 그것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믿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먼저 일어날게요.”
곱게 흘겨보던 그녀의 말에 사내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 흘겨보는 눈매마저 고와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화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처음에 꺼낸 ‘우리’라는 말이 왠지 너무 설레어서였다. 아니 어쩌면, 그냥 그렇듯이, 당연하게, 그녀와 결혼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런 상황에 왜 이런 엉뚱한 확신이 드는지 몰라도 사내는 느꼈다. 이 여자구나.
사내의 친구들은 모두 한참 전에 결혼한 상태였다. 노총각 소리를 듣는 사내는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며 수근수근대는 사람들을 보면 씩 웃어주었다.
사내는 자신에게 어떠한 문제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연애도 곧잘 했고 비록 지방 공장이지만 번듯한 직장도 있었으며 술과 모임을 좋아했기에 인간관계도 원만했다. 문제라고 할 것들은 없었다.
그저 육 남매의 장남이었으며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모아놓은 돈이 없었을 뿐이었다. 결혼할 사람이 생기면 먼저 하라는 형의 말을 잘 들은 둘째와 셋째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형으로, 그리고 장남으로 당연하게 동생들의 결혼은 보태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다.
동생 둘을 결혼시켰으니 이제 자신의 차례인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먼저 갓 결혼해 자신의 살림도 빠듯한 둘째, 셋째와 나이 든 부모님에게만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맡겨둘 수가 없었다.
넷째, 다섯째는 이미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똘똘한 막내는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대학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내는 기꺼이 거의 모든 월급을 적금에 부었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죄가 될 순 없으니까. 그건 칭찬받아야 하는 거고 아직 혼자인 자신이 어린 동생을 칭찬하고 챙기는 것이 당연하고 생각했다. 이건 어쩔 수 없이 그냥 그런 거. 그냥 그런 것이었다.
자리를 박차고 그를 스쳐 지나가는 치맛자락의 팔랑이는 소리가 마치 어떤 신호처럼 들려 지나치려던 손목을 꽉 잡았다.
돌아서는 그녀의 놀란 눈과 눈을 마주치고 나서야 사내는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그녀를 잡고 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손을 놓진 않았다.
이번에는 그냥 그런 거지, 하면서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그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했으니까.
“저는 성실한 건 자신 있습니다. 나이만 많은 노총각이 유일하게 자랑할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가버리시면 저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됩니다.
기왕 여기까지 발걸음 하신 거 잠시만 앉았다가 가시죠. 유일한 걸 잃게 생긴 사람의 절박한 호의를 조금만 느껴보고 가세요.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른들이 주신 기회인데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과 만나 괜히 시간만 버리게 했다는 기분을 들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렇습니다. 제가 잘못한 거니 만회하고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사내는 이렇게 말하며 스스로도 깨달았다. 그녀가 거절하든 하지 않든 이것이 생애 마지막 맞선이 되겠구나. 우습게도 그 짧은 눈 맞춤에서 당연히 그런 것처럼 알게 된 것이다.
사내는 앞으로는 어떤 순간에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흘겨보는 눈매 끝에 살짝 주름이 지는 저 고운 모습이 아니라면 사내는 앞으로 어떤 만남에도 만족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사실 이번이 몇 번째로 나온 맞선 자리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노총각 소리를 듣고 있는 만큼 선자리도 많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사내는 여전히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서 이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유도 없이, 아직 대화를 제대로 나눠보지도 못한 그녀를 보면서 그는 그런 것을 느꼈다. 그렇기에 사내는 도저히 그녀를 놓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였기에.
다행히도 그녀는 화가 나서 뾰로통한 얼굴로 잠시 자리에 앉아주었다. 사내는 이후에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읍내로 나오는 버스가 고장이 나서 여기까지 뛰어왔다고 말한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아름다우시다고 말한 것 같기도 하고, 뭐든 드시고 싶은 것은 다 시키라고 말한 것 같기도 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한참의 침묵 끝에 차로 배를 채울 생각은 없다고 밥을 먹자고 했다. 아마도 사내는 입이 찢어져라 웃었던 것 같다.
함께하는 모든 시간에 허둥지둥 정신없이 움직이고 이야기하는 사내를 빤히 쳐다보며 기다려주던 그녀는 아주 작게 다음에는 돈가스를 먹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서야 사내는 자신의 양복바지에 흙탕물이 잔뜩 튀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런 사내의 모습이 그녀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다.
오늘의 사내는 집으로 돌아와 그저 멍하니 중얼거릴 뿐이었다. 다음에. 돈가스. 계속 중얼거리던 그 단어들은 점점 커져서 그 끝에는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웃음소리가 되었다.
세 번째로 만난 날, 사내는 그녀의 집에 쳐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미친놈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부모에게 떠밀려 처음으로 맞선 자리에 나온 것이었고 어디까지나 경험 삼아 노총각과 만나보려 온 것이었다.
열 살도 더 차이가 나는 노총각이, 겨우 밥이나 세 번 같이 먹은 노총각이, 결혼하자 달려드는 것이 황당할 만도 했다. 마당에 버티고 앉아 무릎을 꿇은 사내는 곧 끌려 나와 대문 밖으로 쫓겨났다.
사내는 쫓겨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상태로 생각했다. 역시 내가 가진 것은 성실한 것뿐이라고. 그렇기에 사내는 그녀가 싫다고 하기 전까지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무릎을 꿇는 사내를 보고 놀라기만 했을 뿐 그를 말리지는 않았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사내에게 이층 방의 창문이 살며시 열리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그녀가 이따금씩 바라봐주는 거겠지. 사내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녀가 싫다고 하지 않았고, 다행히도 가끔씩 창문 너머로 바라봐주고 있고, 아주 다행히도 그녀의 부모님이 경찰을 부르진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사내는 여전히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내는 무릎을 꿇고 앉아 꼬박 밤을 새웠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새벽녘에 잠깐 부슬비가 내렸다. 덕분에 사내는 졸지 않고 눈을 부릅뜬 상태로 밤을 지새울 수 있었다.
동이 어슴푸레하게 떠올 때쯤에 그녀의 아버지가 싸리비를 들고 대문을 나왔다. 아버님은 대문 앞을 쓸기 위해 나왔다가 시커먼 것이 대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자 놀라서 싸리비로 사내의 어깨를 내리쳤다.
인사를 드리려던 사내가 놀라 일어서다가 다리가 저려 옆으로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원래 그가 앉아있던 바닥이 드러났다.
어두운 와중에도 그 부분만 하얗게 비에 젖지 않은 것을 바라보며 장인이 혀를 찼다. 이 망할 놈이 기어코 내 딸을 뺏어가려 하는구나.
다시 몇 번이나 싸리비를 휘둘러 사내의 등을 내리쳤는데 점점 그 강도가 약해지는 것에 그는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버님은 어머님에게 말할 자신이 없으니 얼른 돌아가라고 하셨다. 사내는 며칠이고 무릎 꿇은 상태로 허락받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며 소리쳤다.
큰소리에 뒤늦게 나온 어머님은 입을 벌린 상태로 아무 말도 없이 사내를 바라보았다. 젖은 바닥과 사내가 꿇고 있어 젖지 않은 바닥을 번갈아 바라보던 어머님은 이내 미친놈은 경찰을 불러 내쫓아야 한다고 했다.
아버님은 나는 모르는 일이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문 앞을 쓸었다. 그러다 사내에게 비키라 했는데 사내는 다시 급하게 일어나다가 다리가 저려 주저앉고 말았다.
옆으로 주저앉아 다리를 주무르면서도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려고 하는 사내를 보며 혀를 차던 어머님이 말했다. 흰소리는 하지 말고 조용히 밥이나 먹고 집에 가게.
어머님은 사내를 집에 들인 것을 연신 후회하셨다. 다 들으라는 듯 크게 중얼거리고 있어서 그 험한 소리를 다 들어야 했지만 사내는 그저 싱글벙글 웃었다.
어제는 쫓겨났던 집에 다시 허락받고 들어오게 되었으니 반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웃는 얼굴에 침은 못 뱉는다고 어머님은 차마 면전에 독한 소리는 하지 못했지만 고개를 돌린 상태로 다 들을 수 있는 혼잣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머님이 연신 험한 소리를 뱉으며 차려준 아침 밥상은 고봉밥이었는데 평소 입이 짧던 사내는 세 그릇이나 밥을 먹었다.
무조건 좋은 인상만 주고 싶었기 때문에 주시는 것은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았고, 복스럽게 먹기 위해 일단 크게 퍼서 입으로 넣었다.
배가 살살 아파오는 것도 같았지만 여기서 퇴짜를 받으면 이날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아파할 것을 알았기에 꾹 참았다. 그녀는 밥상에 모로 앉아 그를 흘겨보았다. 미련하게도 먹네. 배부르다고 하고 그만 먹어요.
사내는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부모님이 주시는 건데 어떻게 마다하겠느냐고. 다 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세 번 만나 밥을 먹으면서도 사내가 한 그릇 이상 먹는 것을 보지 못했던 그녀는 끝까지 웃는 얼굴로 그 많은 밥을 다 먹는 사내를 보면서 어른들 앞에서 잘하는 것이 사람이 착하고 성실하긴 한가 보다고 생각했다.
어머님은 투덜거리면서도 사내 앞의 그릇이 비는 것을 보지 못했고 사내가 연신 음식솜씨에 감탄하며 푸짐하게 차려진 반찬까지 싹싹 긁어먹은 후에야 식사자리가 끝났다.
사내가 슬쩍 눈치를 보며 다시 진지하게 고백을 할 시기를 가늠할 때, 신문을 보며 연신 못마땅한 신음을 뱉던 아버님이 조용히 말하셨다. 자네 술은 좀 하나.
어머님이 그런 아버님에게 놀라 손사래를 치며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아버님은 회사에 전화해 일이 있어 출근하지 못한다고 말하고는 사내와 함께 술상 앞에 앉았다.
사내는 배가 터져 죽는 것이 그녀를 놓치고 나중에 후회하다가 말라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해서 아버님이 주시는 술잔을 넙죽넙죽 다 받아먹었다. 안주도 연신 집어 먹었다.
해가 중천에 뜨자 사내의 말은 느려지고 혀가 꼬부라졌지만 몸가짐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슬쩍 말했다. 사람이 미련한 것이 딴짓은 안 하겠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분명히 성실한 것에 자신 있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미련하고 우직하게만 보인다고.
특히나 아버님의 말을 경청하다가 슬쩍 눈을 돌려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헤벌레 하고 웃는 저 표정이 참 멍청해 보였다.
자기 딴에는 숨긴다고 고개를 숙이고 웃었지만 입꼬리가 귀에 걸리다 보니 뒤통수만 봐도 어떤 멍청한 표정인지가 보였다.
어머님은 여전히 혀를 찼고 아버님은 슬쩍 고개를 저으며 웃으셨다. 그녀는 저 우직한 뒤통수가, 멍청한 그 표정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주 작게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도 사람은 성실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