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을 방문할 당신에게(feat.Ema 'Emmy' Hesire)
비가 오거나 이상하게 안개가 많이 끼는 날.
처음 보는 골목에서 은은하게 북소리가 들리나요?
뭔가 친숙하고 흥겨운 음악이 들리면 조심스레 들어오세요.
그 안쪽 화려하진 않지만 이상하게 눈에 잘 뜨이는 네온사인이 하나 보일 겁니다.
그리고 그 네온사인이 보이면 당신은 바, 이바구에 도착하셨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세요. 헤헤헤. 그럼 이미 당신은 바에 앉아 계십니다요.
바 안쪽 홀로 선 마스터를 보세요.
할아버지처럼 묘하게 느릿느릿 하지만 얼굴은 팽팽한 중년이 아닌가요?
바 너머로 이상할 정도로 어깨가 넓고 터질 것 같은 근육의 아이가 보이나요?
키가 천장에 닿을 듯 크지만 묘하게 젊은 느낌의 백발 쭈글탱이 할아비가 서 있나요?
아아, 정수리에 뿔이 달린 빨간 피부의 사내가 보인다고요? 에이, 그건 기분 탓입니다.
당신의 앞에는 이미 당신이 가장 원하던 칵테일이 하나 있군요. 맛있죠?
아마 당신이 평생 원하던 맛일 겁니다. 쭈욱! 들이켜세요. 기분이 좋아질 겁니다.
아니, 이미 바 계실 때부터 이상하게 흥겨웠죠? 당신의 이야기를 해주고 싶을 만큼이나요.
역시! 음악을 들을 줄 아시는군요! 중간중간에 들리는 저 피리 소리요?
태평소일 수도 있고 플루트일 수도 있고 오카리나일 수도 있죠.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소리가 귀로 모이는 건데.
사소한 건 넘어가죠. 중요한 건, 당신이 가장 원하던 음료와 가장 원하던 음악이 나오는 이곳이 바, 이바구라는 겁니다.
그저 당신의 이야기하고 싶은 곳. 당신에게 가장 슬펐던, 기뻤던, 기묘했던, 행복했던, 오직 당신에게만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곳.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가장 잘 들어주는 마스터가 있는 곳입니다. 사실, 이야기를 너무도 사랑하는 마스터는 당신을 이루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져 선물을 주기도 해요.
기분이 나쁘면요? 아아. 걱정하지 마세요. 여긴 지옥이 아니에요. 그저 마스터의 이야기 하나를 들어주시면 된답니다.
누구나 어쩔 수 없이, 한 번쯤은, 아니, 가끔은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까요.
더 중요한 건 뭔지 아세요? 모든 것이 공짜라는 겁니다. 아니, 공짜는 아닌가? 당신의 이야기를 값으로 받는 건가?
아니지. 당신이 원하는 음료를 마시고 가장 원하던 음악을 듣고 기분이 좋아서 떠드는 게 왜 그 대가이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아주 작은 공감을 원할 뿐입니다.
당신의 이야기에 우리는 가끔 공감하고 싶을 뿐입니다.
아니면 우리의 이야기를 공감해주거나.
하나의 이야기는 하나의 세계이죠. 그 복잡한 곳에 우리는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가벼운 노크를 하고, 흥미로운 부분만 듣고 우린 다시 갈 길 가겠다 이겁니다.
아니, 멋대로 우리 땅에 들어와도 손님 대접해준다는데, 거, 이야기 한 소절 두고 가는 걸 아쉬워하지 마세요.
매일이 다 같은 하루처럼 느껴진다면 어떻습니까. 맛난 거 마시고 좋은 음악 듣고 실컷 떠들다 가시라 이겁니다. 어차피 비가 그치면, 이 안개가 가시면, 처음 보는 골목은 사라질 테니까요.
당신의 이야기를 해줄 마음이 들었나요? 처음 음악을 들으며 음료를 마실 때부터 이미 이야기를 시작했었다고요? 죄송합니다. 간만의 손님이라 너무 신났나 보네요.
자, 이건 안주입니다. 씹을 거리죠. 가장 원하는 맛의 음료와 적절히 자극적인 씹을 거리, 얼마나 좋습니까?
근데 나 너무 말이 많은데? 이런 멍청이. 아까 심심하다고 마스터에게 한잔 받아먹었구나. 어쩐지 말이 많더라. 계속 이야기를 하고 싶더라.
몇 년 만에 찾아온 손주를 반기는 할머니처럼. 아니, 할아버지처럼. 어? 저기. 마스터. 저는 할머니예요, 아니면 할아버지예요?
자꾸 지방방송 하는 저는 누구냐고요? 제 소개를 안 드렸군요. 저는 바, 이바구의 주방장입니다. ‘에미 Emmy’라고 불러주세요.
저 이쁘죠? 키야. 저도 이 몸에 반했다니까요. 늘씬하고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오고. 탄탄하기까지. 성별이요? 에이. 그건 상상에 맡기죠. 게다가 어차피.
아아. 마스터가 째려보기 시작했어요. 사실 제 이야기는 마스터가 전부 알기에 흥미가 없으시거든요. 마지막 주의사항을 이야기하고 가만히 구석에서 저도 조금만 이야기를 훔쳐 들을게요. 그 정도는 마스터도 묵인해주시거든요.
돌아가실 때는 꼭 들어오신 문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문을 연 적이 없으시다고요? 그럴 리가요. 이야기를 마치고 음악이 멈추면 당신은 들어온 문이 기억나실 겁니다.
그렇죠? 꼭 들어오신 곳으로 나가셔야 해요. 다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가고 싶다고 해도 다른 곳으로 가시면 안 돼요. 뭐, 그러기도 쉽지 않겠지만.
여기는 바, 이바구. 모든 이야기가 모이는 곳.
새로운 문을 열었다가 갓을 쓰고 장풍도 쓰는 사람들 사이에 떨어지면 무섭잖아요.
갓 쓰고 인조인간 사이로 떨어지면요? 인조인간은 부품도 없는 판타지 세계로 가는 게 달갑겠어요?
그러니 제 말을 들어요. 어차피 우리는 거창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었잖아요? 거기 간다고 달라지겠어요? 그리고 당신은 그나마 당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중이잖아요.
지금까지의 삶을 모두 버리고 미친놈처럼 세상에 처맞아가며 다시 시작할 열정이 있다면 응원하겠지만 저는 권해드리지 않습니다. 그런 건 저기 차원 암거래상에게 가셔야 해요.
아이고. 헛소리는 그만하겠습니다. 너무 떠들어서 마스터가 고개를 돌려서 저를 보고 계세요. 상체까지 돌리면 오늘은 인간형을 포기당하고 창고에 처박힐지도 몰라요.
그건 싫어요. 전 이 몸이 너무 좋거든요.
자, 쭈욱 한잔하시고, 안주도 옳지 아작아작 씹으신 후에, 당신에게 가장 은은하게 흥겨운 그 노래에 맞춰 다시, 다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아. 여기는 바Bar, 이바구Ebagu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