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박지탄, 그 이어지지 않는 시간, 한 번 더
매우 화가 났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표출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또다시 진급이 좌절되었다. 기사단에 입단하면서 끊었던 술이 당기는 날이었다.
검술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평판이 나쁜 것도 아니지만 매번 진급은 되지 않는다.
최근에는 보고서 작성에 문제가 있다 하여 거들떠보지도 않던 서류 작성법이나 예산안 구성법 등을 기사단 서기관에게 배우기도 했다.
그전에는 화술이 문제라 하여 궁중 화술 수업에 매진했었고 또 그전에는 예법에 문제가 있다고 예절 수업을 듣기도 했다.
검술, 전략, 병사 조련 쪽에서는 부족하다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기사로서 어떤 것이 우선인지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평가를 받아야 하니까. 하지만 그렇게 꾹꾹 누르고 참으며 노력했음에도 이제는 몇몇 후배들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만년 평기사.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서류만 귀족인 변방의 한미한 출신 때문일까. 애초에 입단조차도 몇 년이나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그때는 그저 자신에게 모자란 부분을 채울 시간이 필요했다고 다독였다.
어차피 자신은 왕립기사단에 들어갈 인재이니 기사단에 입단해 바빠지기 전에 모자란 것들을 채울 기회라고. 실제로 기마술이나 방패술이 가장 눈에 띄게 발전했던 것도 그 시절이었다.
나중에 훌륭한 인재를 몰라본 이들 앞에서 당당하게 보이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다시 검을 들고 방패를 쥐고 말을 달렸다.
문득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언제까지 이를 악물어야 하는가.
생각할수록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 힘들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애마에 올라 연무장을 벗어났다. 그런 그를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못 본 척해주었다.
그 배려에 감사할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서서 훈련용 갑옷을 벗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런 일이 처음이었기에 집안의 사용인들이 조용히 문을 닫고 그를 혼자 있게 해 주었다. 몇 번이나 소리를 지르고 나니 조금 머리가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노기사는 자신이 소리를 지르고 있는 이 시점이 국왕을 만나기 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 잠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는 아련해진 기억 속의 장면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혹시나 싶어 움직여 보려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못했다. 그저 기억을 되돌려보는 것만 가능할 뿐.
이제는 오래된 기억. 그 아련한 기억 속에서 현 국왕, 영원한 충성을 맹세한 주군, 그 당시의 셋째 왕자를 만나기 전에 노기사는 만년 평기사 소리를 듣는 사람이었다. 검술, 집단전, 전술전까지 모의 전투에서 항상 높은 점수를 받았으나 그것은 항상 진급 평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때를 지금의 노기사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었다.
젊어서 주변을 보는 눈이 없었다고.
‘사회’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도 없었고 알 생각도 하지 않았던 시기였다고.
그저 실력을 높이면 모두가 알아줄 거라고 생각하던 시기였다고.
어쩌면 가장 순진할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더 상처받고 힘들었지만 곧 젊은 시절의 주군이 나타나 자신을 알아볼 것이고 이후 승승장구하며 가장 찬란한 시기를 보낼 것이기에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오히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젊은 자신이 못마땅하기도 했다. 품위 없는 짓을, 어차피 다 지나갈 일인데 말이다.
이내 노기사는 혼자서 중얼거리던 것을 멈췄다. 멈췄다기보다는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 시절의 꿈이라 생각했던 순간이 지나가고 젊은 자신의 감정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니,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홍수가 터지듯 감정이 물밀 듯이 밀고 들어와 노기사의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머리에는 그 시절의 억울했던 기억들이 마구 떠오르고 불리한 기록을 남기던 선임기사들과 뼛속까지 귀족이며, 권위와 품위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던 당시의 기사단장의 불합리한 행동들이 떠올랐다.
노기사의 이성은 이것은 지나간 감정이며 기억이라 생각하고 지금의 '나'완 상관없다고 뿌리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분명히 이것은 젊은 자신이 기억하고 느끼는 것이고 이제는 과거가 되었다 해도 노기사 역시 겪었던 일이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졌으며 이제는 품었던 기억마저 너무 오래되어 조금씩 달라져 완전히 굳어버렸다고 해도, 이렇게 생생하게 밀려오는 기억과 감정들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이내 노기사는 그 모든 기억과 감정에 저항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사실, 그 기억들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보자니 억울한 감정이 공감되었다.
그 시절의 자신은 정말 자는 시간까지 쪼개가며 죽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며.
그리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치면서도 자신이 지친다는 것에 오기가 생겨 더 이를 악물고 버티고 노력하고 있었다.
차별을 받는다고 느끼긴 했지만 배척은 아니었다. 공평하진 않지만 가끔 기회는 돌아온다.
그 부분이 젊은 기사를 미치게 만들었다.
기사단장은 고루한 귀족이지만 완전히 꽉 막힌 이는 아니어서 모든 이들에게 기회를 주려 했다.
왕립 기사단에 어울리지 않는 이는 있더라도 그들이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을 선발한 이들 또한 귀족이기에 틀린 선택을 했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
품위가 떨어지는 이들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들 또한 왕립기사단의 일원이기에 어디서도 무시당하여선 안 된다는 말을 종종 했다.
젊은 기사는 어떤 시험에서든 언제나 상위권,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준비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사소한 시험에도 열정적으로 임했다.
처음 주어졌던 기회, 첫 파견 임무에서 너무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다가 오히려 작은 실수가 생겼다.
두 번 세 번 확인해 가며 병력 손실 없이 임무를 마쳤지만 너무 길어진 작전 시간 덕에 임무를 해결하고도 들인 돈이 더 많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기사단장은 경험 부족으로 인한 상황 판단 미숙이라 말했다. 안전하면서도 빠르게,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나 그러지 못했다고.
기사는 배운 대로 한 것이라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보고서에 완벽함을 기하다 이루어진 작은 실수라고 명기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기회에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다음 기회는 오지 않았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첫 파견에서 임무를 절반이나마 성공했던 이들은 많지 않았다. 병력을 잃고 아예 임무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다. 허나 그런 이들조차 몇 번이나 기회를 받아 파견을 나갔으나 그에게는 그 한 번의 기회 이후에 새로운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묵묵히 준비했다.
시대가 변하며 나타나는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익혔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힘들었지만 그것이 익숙해지면 희한하게도 기존에 익히고 있던 검술이나 방패술, 기마술에 응용할 수 있는 것들이 생겼다.
아는 것이 많아지고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그의 무기는 단단해져 갔다.
특히 전술 전략 쪽에서는 새로운 개념을 가지고 접근하는 그에게 교관이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 생소한 전술을 통해 이미 장단점이 알려진 기존의 전술을 맞춤 파훼하는 방식은 교관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일부는 너무 급진적이며 과격한 방식의 전술이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이론상 허점은 없으니 실전에서 확인해봐야 한다는 이들도 있었다.
교관들 내부에서 생긴 이러한 주장들은 교관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이 몇 번이나 회자되게 만들었다.
병력 손실을 막으려다가 임무 기간이 늘어났다면 병력을 더 강하게 만들어서 임무 기간을 줄이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규모 전투와 대규모 전투의 전술은 같을 수 없는 거니까.
소규모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의 배치와 조원들의 무기 구성을 바꾸는 안을 고안했다.
훈련 중 병력을 지휘하는 소규모 전투에서 그 성과를 몇 번이나 보여주었다.
심지어 병력이 열세인 상태에서도 더 많은 병력을 지휘하는 이들을 이겨내기도 했다.
교관들은 환호했고 기사단장은 손뼉을 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단장은 훈련이 끝나고 품평하며 젊은 기사를 앞으로 불러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해 주었다.
젊은 기사는 환하게 웃었지만 단장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전통은 오랜 기간 검증되었기에 전통이고 아직 표본이 적은 상태에서 전격적인 교체는 어려우며, 서로를 보완하는 형태의 진은 한번 와해되면 더 큰 피해가 날 것이라 지적했다.
상황이 한정된 훈련이기에 강하게 보이는 것뿐이라고. 참신한 것은 좋으나 급진적인 것은 언제나 피해를 불러오니 더 안정적으로 운용할 방법을 찾으라고 말했다.
지적을 끝나고 그 참신한 생각에는 찬사를 보낸다며 다시 어깨를 두드리며 잘했다 칭찬해 주었지만 기사의 귀에는 그저 지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다른 기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훈련이 끝나고 며칠 후부터 소문이 돌았다.
몇 번을 강조한 단장의 극찬은 사라지고 어느새 전통을 중시하는 단장이 직접 앞으로 불러 지적한 급진적인 기사가 되어 있었다.
그 소문의 끝에는 항상 붙은 공통적인 한마디가 있었다.
어쩌면 단장이 은퇴할 때까지 계속 평기사로 남아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마음을 굳혔다.
새로운 것을 배워도,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도, 더 나은 효율을 증명해도 자신에게는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다.
교관들과 기사단장마저 자신을 칭찬하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이제는 이십 대 중반. 세 번이나 도전해서 들어왔던 곳이지만 이제는 결정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기사단에 입단하며 끊은 술을 한잔하고 싶어졌다.
기사는 몸을 웅크렸다. 아직도 벗지 못한 갑옷이 쓸리며 쇳소리를 냈다.
그때, 조심스레 문이 열렸다. 기사는 고개를 숙인 채로 소리를 질렀다.
“누가 허락도 없이 들어왔지? 어서 나가!”
불청객은 천천히 문을 닫았다.
문을 닫았음에도 방 안에서 기척이 느껴졌기에 젊은 기사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에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밀려오는 기억과 감정에 치여 무기력하게 바라만 보던 노기사가 벼락에 맞은 듯 부르르 떨면서 쥐어 짜내듯이 소리를 질렀다.
부인? 오오. 내 사랑! 이렇게 젊은 시절의 그대를 보게 되다니!
그와 함께 젊은 기사의 멍청하고 멍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나? 누나가 어떻게 여기에?”